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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사기묵상

사사기묵상04 - 순종은 나의 호불호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사기 1: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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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는 호르마정신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새로이 집을 짓는다면 맨 먼저 무엇을 할까요?
아마도 그 땅에 있는 구조물들을 다 허물고 기초를 파겠죠.

최근, 뉴스에 보니 어쩌구니 없는 사건이 있더라고요.
혼자 사는 집에서 자꾸 돈이 없어져서 주인은 방 안에 CCTV를 설치했데요.
그랬더니 글쎄 어떤 모르는 사람이 버젓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방을 마음대로 휘저으며 있는 돈들을 가져가더라는 거예요.
그 사람을 잡고보니 이전에 이 집에서 살던 사람이더랍니다.
그런데 현관문의 카드키를 반납하지 않고 가지고 있더라는 거예요.
새로 이사 온 사람이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은 것을 알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드키로 마음대로 들어온 거죠.
황당한 사건이죠?
새롭게 이사를 오면 이전의 흔적들을 없애야 하죠.
내 집이니까요.
호르마정신은 그런 개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좀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본문을 가만히 읽다 보면 계속 중복되는 말들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눈치채셨어요?

27, ‘몰아내지 못하였으므로’
28, ‘모조리 몰아내지 않고’
29, ‘몰아내지 못하였으므로’
30, ‘몰아내지 못하였으므로’
31, ‘몰아내지 못하였다’
32, ‘쫓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33, ‘몰아내지 못하고’

성경은 “쫓아내지 못했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저는 왠지 “쫓아내지 않았다”라고 읽힙니다.
못한 것과 안 한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죠.
그럼에도 제가 그렇게 읽게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입니다.

28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강성해진 다음에도 가나안 사람을 모조리 몰아내지 않고, 그들을 ‘부역꾼’으로 삼았다.
30    스불론 지파가 기드론의 주민과 나할롤의 주민을 몰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살면서 ‘부역꾼’이 되었다.
33    납달리 지파는 벳세메스 주민과 벳아낫 주민을 몰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인 가나안 사람과 섞여 살면서, 벳세메스와 벳아낫 주민을 ‘부역꾼’으로 삼았다.
35    그리고 아모리 사람은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살기로 마음을 굳혔으나, 요셉 가문이 강성하여지니, 그들은 요셉 가문의 ‘부역꾼’이 되었다.

여기서도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들이 있군요.
‘부역꾼’으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들이 이방인들을 몰아내지 못한 이유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역꾼으로 삼기 위해서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쫓아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경제적인 이유로, 혹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호르마정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이런 말들을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정의가 밥 먹여주냐?”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옳고 그름보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길을 가야지”
우리는 이렇게 실용주의적인 사회에 삽니다.
이익에 따라 원칙이 바뀌고,
실리에 따라 생각이 변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은 우리와 하등 다르지 않은 모습이에요.
하나님의 말씀보다, 명령보다, 계획보다, 나의 판단이 더 우선하고,
그분의 원칙보다 나의 이익이 더 중요하죠.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라는 신을 믿는다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가? 가 아닐까요?
그분의 원칙에 따른다는 뜻 아니겠어요?
나의 호불호와 관계없이 그분의 생각에 순종하는 것 아닙니까?

순종이란 나의 판단을 우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이 진짜 순종되려면 나의 판단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죠.
나의 판단과 똑같다면 순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나의 호불호와 다르고, 나의 생각과 다르기에 순종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까워도 버릴 때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라면 버리는 것이 얻는 거예요.
순종은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내 마음에 관철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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