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복음1] 복음이란 무엇인가?
누가복음19:1~10,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인터넷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자동차들이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는 모습은 평범한 주차장을 연상시켰는데요. 그러나 이 사진은 주차장의 사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파트 주차장 입구를 막은 주민들의 차량 사진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인가 하니, 이 아파트의 절반이 미분양상태였는데 그 분량을 정부가 임대주택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사들였답니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갈 19세대를 추첨을 통해 뽑아 공급했습니다. 이 사진이 찍힌 이 날은 그들이 이사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입주민들이 반대를 하며 이사 짐의 출입을 막은 것이죠. 반대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물론 저는 어느 특정의 사람들을 힐난할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입주해 있는 분들과 충분히 협의를 못한 정부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나의 기득권을 위한 행동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하는 삶을 살죠. 이것은 세상에 뿌리를 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이기 때문이죠. 보통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요. 우리가 말하는 세상은 [안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혹은 우리가 사회(직장/학교/지역)라고 부르는 곳도 아닙니다. 이것은 이 땅에 흐르는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엡2:1~2,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를 공중권세 잡은 통치자의 영이 작용하는 곳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인데요. 이 흐름은 나도 모르게 작용하는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인 영향입니다. 보다 정확한 표현은 아마도 법(法)일 것입니다. 그 사회, 그 땅에 흐르고 있는 법이죠. 한국에서 살면 한국의 법이 있습니다. 미국에 살면 미국의 법이 있고요. 우리는 그 법을 은연 중에 지키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명시적인 법령에 의한 법도 있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의 뼈 속에 흐르는 법이 있지요. 그 법 밖에 있으면 범법자가 되거나 망나니로 낙인이 찍히죠. “중간이나 가라”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그냥 흐르는 데로 가라는 말은 이 법을 지키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이 법이 보이는 법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법도 있죠. 이 땅에는 보이지 않는 영의 법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바울은 또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하기도 했죠. 좀 전에 예를 들었던 아파트의 문제를 한번 본인에게 대입시켜보세요. 어렵게 돈을 만들어 집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주위에 가난하고 어렵고 장애인이 들어온데요. 주위에서는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고 아우성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어요? 아마도 직접 차로 이사를 방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성격의 차이일겁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죠. 왜요? 내가 성질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풍조가 그렇게 때문입니다. 세상에 흐르는 영에 의해 살면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세상의 흐르는 영에 의해 살면 그렇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도 하나님의 영적 흐름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를 말하죠.
롬8:9,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에서 봉사하고, 선교하는 이들은 힘이 넘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똑같이 힘들고 하기 싫은 일들입니다. 그럼에도 왜 그들은 그 일을 할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착해서, 사람이 좋아서 등 성격의 문제로 말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세상에 의롭고 착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법으로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법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 아래에서 사는 것이죠. 바울은 이렇게 말하죠.
롬8: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말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전부다 알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뭐냐고 묻는다면 잘 말하지 못합니다. 물론 복음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함축적 의미가 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복음(福音)이라는 말은, 한자 표현 그대로 하면 복된 소식이라는 뜻이죠. 좋은 소식, 기쁜 소식, 반가운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반가운 소식이 무엇인가? 복음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죄 아래 있던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신 이야기, 그것이 복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와 죽음의 법에 있던 우리를 생명의 법 아래로 옮겨놓은 사건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를 우리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복음, 그것은 우리를 잘 되게 하는 소식, 나를 잘 살게 하는 소식이라고요. 일면 맞습니다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습니다. 이런 가정을 해 보십시다.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이런 저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 안에도 머리칸이 있고, 꼬리칸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도 뭔가 편한 자리를 누리는 사람이 있고, 힘겨운 사람이 있습니다. 편히 먹을 것을 누리는 사람이 있고, 굶주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도 있고, 늘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이 감옥에서 탈출을 하자고 외칩니다. 다른 세계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감옥에서 잘 살 수 있게 해줄께!”
“먹을 것을 풍부하게 주고, 권력도 줄께!”
사람들은 누구를 따를 것 같습니까? 어떤 것이 진짜입니까?
마11:28~29,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단어가 눈에 들어오십니까?
“쉬게하리라.” “쉼을 얻을 것이다.”
맞습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예수를 믿으면 쉼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쉼에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멍에]을 매고 [그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쉼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과 성령의 법을 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짜 복음은 그저 좋은 것을 준다고만 말합니다. 가짜 복음은 쉼을 준다고, 죄와 사망의 법을 잊으라고만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 복음은 멍에를 지는 일입니다. 전혀 다른 세상의 법 아래에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죠.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키가 작은, 난쟁이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간절함을 배우게 되죠. 사회적 체면을 버리고 예수님을 만나라는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축복을 받는 장면은 석연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갈망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열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면 구원을 얻는다고요. 그래서 새벽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합니다. 열정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국사람들이기에 축복받았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열정만 가지고 삭개오는 구원을 누린 것일까요? 이 질문의 답을 위해서 우리는 차근히 본문을 읽어 내려갈 필요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았다고 말하는데요. 어떤 신학자는 그가 150cm 이하였을 것이라 합니다. 무시당하며 살았겠지요. 못생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키 작고 못 생겼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네.... 돈 벌어야겠다.
우리 예은이 처음 태어났을 때 외삼촌이 농담으로 했던 말이 있습니다.
“공부나 열심히 시켜야겠다.”
저는 예은이가 지금 준수하게 자라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 정도면 이쁘지 않습니까?
삭개오는 그래서 세리가 되기로 한 것이죠. 로마 압제의 세리는 그야말로 일제강점기 순사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당했죠. 세금을 자기 마음대로 책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로마에 상납하고, 일부는 자신이 가졌죠. 그것이 로마로부터 용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된 것이죠. 그리고 사람들은 미워하고 경계하다 못해 그들을 “죄인”이라 칭합니다. 성경은 세리를 말할 때 형용사인 ‘죄인’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죠. 게다가 세리장까지 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방법으로 산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민족도 없고, 공동체도 없고, 오직 나를 위해 산 인물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그에게 어떤 말씀과 영향을 주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에게 커다란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이 변화가 보이십니까? 지금까지 세상의 법 아래에서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삭개오가 사랑의 법 아래에서 살겠다고 고백하는 이 변화,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법 아래에 찌들려 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 아래에서 살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십자가로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을에 오신다는 기쁜 소식이 들립니다.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진짜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 되려면 십자가의 멍에를 지어야 합니다. 말씀이 진짜 말씀이 되려면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진짜 그리스도인 되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 주신 복음이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되려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선포된 것입니다.
지난 달 시리아에서는 기독교 청년 8명이 이슬람을 배교했다는 이유로 이슬람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공개된 장소에서 이루어져 8시간 동안 방치되었습니다.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이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왜 이들은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켰을까요? 나의 것, 나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어쩔 수 없는, 고난도 어찌 못하는 가장 기쁜 것을 얻었기 때문이죠. 바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라는 신분입니다. 그 기쁨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복음은 내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여는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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