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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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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묵상60 - 저절로 이루어지는 구원 또한 없습니다. 예레미야 23:1-15 오늘 말씀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곧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선포하고 있죠. 6절에 보면, 사람들이 곧 부르게 될 이름이 있는데요.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라'는 뜻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9절에 보면, 심장이 터진다는 표현이 있어요. 의미는 좀 다릅니다만 우리는 '속이 터진다'는 말을 곧잘 하죠. 이는 아마도 내 마음 같이 않을 때일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때,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내 마음에 가득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인데요.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말씀이 가득해서, 그분의 생각과 사명으로 가득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게다가 그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되었다는 표현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
예레미야서묵상59 - 저절로 좋은 부모가 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22:24~30 오늘 본문은 고니야라고도 불리는 여호야긴을 향한 무시무시한 경고로 가득한데요. 고작 나라를 다스린 기간이 석 달밖에 되지 않는 그에게 무슨 잘못이 그리도 많아서 이런 경고를 하실까 싶어요. 성경은 그가 어떤 악한 일을 저질렀는지 소상히 밝히지는 않고 있는데요. 다만 악했다는 것만을 기록하고 있죠. 그래서 더욱 궁금합니다. 무엇을 그리 잘못했을까?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른 시기에 대해 성경의 기록은 조금 엇갈립니다. 열왕기하 24장에 보면 그가 왕이 될 때의 나이가 18세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역대하 36장에 보면 그 나이를 8세로 기록하고 있죠. 아마도 성경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대체로 18세로 해석을 합니다. 보통 필사의 과정에서 빠뜨리는 경우는..
예레미야서묵상58 - 나의 삶은 주님이 주신 사명이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예레미야 22:13-23 오늘 본문의 경고는 여호야김 왕을 향한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요시야 왕의 첫 번째 아들입니다. 원래 이름은 엘리야김이었죠. 요시야 왕이 죽은 뒤, 유다 백성은 어떤 이유로인지 첫째인 엘리야김이 아닌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오른 지 석 달만에 이집트 왕 느고에 의해 폐위되죠. 그리고 세워진 왕이 엘리야김입니다. 이집트에 의해 세워진 왕인 셈이죠.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름입니다. 이집트 왕 느고는 그의 이름을 엘리야김에서 여호야김으로 개명을 시켰습니다. 여호야김은 그렇게 1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이집트의 꼭두각시 왕으로 군림했다고 해야겠죠. 그동안의 통치 활동은 한마디로 폭정의 나날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열왕들과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에 혈안이 된 것은 둘..
예레미야서묵상57 - 가만히 있으면 멸망의 길이고, 나를 바꾸면 희망의 길이 됩니다. 예레미야 22:1-12 이스라엘은 사울 왕을 시작으로 다윗과 솔로몬까지 왕조를 형성합니다. 이를 통칭해 통일왕국시대라고 부르죠. 이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뉜 분열 왕국시대를 맞는데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집니다. 갈라진 이스라엘은 쇠락의 길을 거듭하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북방 신흥강국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그로부터 130여 년 후에 남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남유다의 멸망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요. 남유다의 마지막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요시야 왕은 열왕들 중에서 보기 드문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을 통해 이스라엘을 변혁시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죠.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들이 각각 요시야 왕을 이어 왕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 모..
예레미야서묵상56 -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21:1-14 오늘 본문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등장합니다. 그는 남유다의 마지막 왕이죠. 아버지 요시야 왕과는 달리 그는 하나님을 등진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바벨론의 침략이 있었고,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포로로 끌려가게 되죠. 이런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하나님께 부탁하여 멸망을 막아달라고 기도해 줄 것을 요구하죠. 그의 부탁이 진정성 있는 회개인지, 아니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인지는 다음 구절에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의 간청을 물리치시죠. 만약 그의 간청이 회개였다면 하나님께서는 들으셨을 것입니다. 시드기야의 고조할아버지였던 히스기야는 기도로 생명 연장을 허락받기도 했으니까요. 많은 이들이 기도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
예레미야서묵상55 -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에 ‘파타’(유혹)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 20:10-18 오늘 본문은 수군거리는 이스라엘의 음성으로 시작합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위의 문장은 원문으로 읽어야 제맛인데요. 약간의 말장난 같은 문학적 표현으로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개정개역본으로 이 구절을 먼저 보죠.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새번역의 번역에는 ‘실수’인데 개정개역본에는 ‘유혹’이라고 되어 있죠. 또 ‘덮친다’는 표현은 ‘이긴다’로 되어 있습니다. 새번역은 의미 전달에 주력한 반면, 개정개역본은 단어의 뜻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 같아요. 이 문장의 원문을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이런 표현입니다. “예레미야를 ‘파타’(유혹)해서 그가 ‘파타’(유혹)되면, 우리가 그를 ‘야콜’(이기다)하자” ..
예레미야서묵상54 - 안 넘어지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예레미야 20:1-9 오늘 본문은 착잡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 때문에 오히려 핍박을 받는 예레미야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죠. 항아리를 깨뜨리며 범죄 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는 예레미야를 바스훌이 보았던 모양입니다. 바스훌은 제사장으로, 성전을 총감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차꼬를 채워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차꼬는 손이나 발에 채우는 수갑의 일종이죠.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하신 설교 가운데 팔복이라고 이름 붙여진 말씀이 있습니다. 그중에 이런 말씀이 있죠. 마 5:11~12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
예레미야서묵상53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레미야 19:1-15 예수님의 말씀에는 많은 비유들이 등장합니다. 그 비유의 특징은, 당시 말씀을 듣는 이들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를 아시죠? 겨자씨는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겨자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너무도 잘 알았어요. 열 처녀의 비유는 당시 결혼 풍습을 다루죠.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보고, 배우고, 체득한 관습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또 어떤가요?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자체만으로도 비난의 대상이 되죠.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을 유대인보다, 그것도 존경받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낫다는 식의 비유는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기 충분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시청각적 말씀선포는 사람들의 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