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 8:30~33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군대입니다." 많은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기슭에, 놓아기르는 큰 돼지 떼가 있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 달아서 호수에 빠져서 죽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모든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또한 국가적 혼란도 가중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본심이 나온다고 했나요?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생생히 보고 있습니다. 지도자를 자처하는 기성세대가, 대의와 정의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급급하여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낯이 뜨거울 만큼 부끄럽습니다. 반면 추운 날씨에 내 일처럼 거리로 나와 질서를 지키고 쓰레기를 주워가며 평화적인 시위에 참여하는 성숙한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 또한 희망이 보여 눈물 나게 감사하기까지 하네요. 이 아침에 우리는 진영과 이념을 뛰어넘어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기도했으면 합니다. 부끄러운 어른이 되지 않기를, 그리고 반면교사 삼아 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이 아침이 되길 빕니다.
오늘 본문의 묵상은 의문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에게 귀신이 들어갔고, 그 귀신은 자신을 '군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 앞에 멸해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께 지옥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간청이 가능할까요? 귀신의 간청, 사탄의 간청이 통하겠습니까? 허나 오늘 본문은 여기서 우리의 생각과 다른 전개로 진행됩니다. 그 간청을 예수께서 받아주셨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귀신들이 원하는 대로 돼지 떼에 그들이 들어가도록 하셨다는 거죠. 이게 의문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귀신을 봐주시는 듯한 뉘앙스여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죠. 더 나아가 돼지 떼가 등장하는 것이 더욱 의문입니다. 돌연 돼지의 떼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우리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죠.
일단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이런 의문에 대한 정답을 저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학문적, 기술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제가 과문한 탓에 따라가기조차 어렵습니다. 다만 오늘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말씀 앞에 선 제게 주신 은혜를 의지하여 본문의 메시지를 찾을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경은 전후 맥락과 함께 인문학적 해석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광인으로 불리는 거라사의 그 '한 사람'을 일개 정신병자로 취급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밖에 있으면 결코 그 광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묵상했습니다. 또한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러, 그것도 죽음의 풍랑을 통과하며 거라사까지 가셔서 유일하게 하신 일이 이 광인을 만나는 일이라는 사실은, 이 에피소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사건과 관련되어 있음을 떠올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우리는 새롭게 읽어야 할지도 몰라요.
일단 예수께서 귀신들의 간청을 받아들이셨다는 대목을 따져보아야 합니다. 이는 귀신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귀신은 우리를 해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에게 타협이란 결코 없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기까지 단호하셨던 주님이시기에 그들의 간청을 들으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으리라 사료되죠.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지금 성경은, 주님의 말씀을 벗어난 '사람'이 어떤 처지에 빠지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떠난 이들은 바로 거라사의 광인과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죄인'이라고 부르죠. 그런 우리를 주님은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돼지가 등장합니다. 일단 돼지에게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돼지를 희화화할 생각도 전혀 없어요. 다만 우리는 인문학적 은유와 해학을 바탕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고 있음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상황을 잠시 돌아보죠. 요즘은 희미해졌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나와있기 때문이죠. 요즘은 오히려 중동지역 대부분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죠. 당연히 사고팔거나 기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돼지 떼가 있죠.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유야 간단합니다. 그들도 아마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현실적 삶의 방법에 따라 돼지를 길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들은 유대인의 거주지와는 조금 떨어진 요단강 동편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율법에서 점점 멀어지고, 신앙의 원칙이 희미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죠. 말씀이 관념화되고 있죠. 말씀을 듣지만 그것은 그저 하는 소리, 혹은 의례적 소리로 듣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란,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그저 멋진 소리쯤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말처럼 되어버렸죠. 극단적인 원칙론자나 근본주의자가 되어야 옳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자신의 삶의 방법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과, 듣기만 하고 자신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죠. 말씀에 해답이 있음을 믿고 말씀 속에서 다양한 방법을 찾는 것과, 말씀과 삶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어쩌면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 큰 돼지 떼를 이룰 만큼 성공을 거둘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성공은 늘 모래 위에 쌓은 것처럼 한 순간의 유혹과 문제로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묵상한 바죠. 오로지, 늦어도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야 합니다. 내 뜻과 달라도 말씀 위에서, 그리고 순종 속에서, 나를 만들어가야 하죠. 그렇게 믿음과 순종 속에서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나를 보게 되는 것이 말씀 위에 선 자의 축복입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의 창조주이신 주님을 의지하고 따를 때 우리는 정금같이 단단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긴 호흡으로 주님의 길을 가세요.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저는 믿음의 경주라는 말로 바꾸고 싶어요. 여기에는 어떤 꼼수도, 어떤 반칙도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한 만큼, 내가 걷는 만큼, 그리고 내가 몸과 마음을 다해 쏟은 만큼 얻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주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는 이들만이 최선을 다한 결과에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이 임할 것이니까요. 지혜는 말씀 밖에서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그 말씀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임하신 그 은혜 안에서, 주님의 손길, 주님의 눈물, 주님의 보물을 찾아내는 것이 진짜 지혜입니다.
'묵상하는말씀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79 - 내 이름을 걸고 오늘을 사세요. (1) | 2024.12.10 |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78 - 좋은 사람이 되세요. (0) | 2024.12.09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77 - 예수 믿으면 괴롭습니다. (5) | 2024.12.06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76 - 거라사의 광인은 주님을 떠난 바로 나입니다. (0) | 2024.12.05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75 -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0) | 2024.12.04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74 - 보혈이 혈육보다 진합니다. (1) | 2024.12.03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73 - 믿음에 중간은 없습니다. (0) | 2024.12.02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72 - 하나님의 나라는 견디는 자의 것입니다. (1) | 2024.12.01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71 -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습니다. (1) | 2024.11.29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70 - 우리의 신앙은 평상시에 자랍니다. (1) | 2024.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