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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78 - 좋은 사람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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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8:29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귀신이 여러 번 그 사람을 붙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서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어 오직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사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그분의 마음으로 오늘도 좌고우면 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지난주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괴로움에 빠졌던 광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둠은 빛 앞에서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라고 했죠. 그래서 우리의 옛사람, 우리가 살아왔던 습관에 고통이 없으면 그것은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단번에 습관을 고치기 쉽지 않습니다. 단번에 새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태우고 버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죠.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삶의 괴로움은 나를 태우고 새롭게 세우기 위한 사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괴롭다면 그것은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 아직도 어둠의 시절 가지고 있던 습관, 빛 앞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미련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거죠. 그때 우리는 나를 바꿔야 합니다. 괴로움을 나쁘게 보지 마세요. 괴로움은 새로움의 불쏘시개이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은 그 과정에서 짧은 상황 설명 하나는 덧붙입니다. 그 괴로움의 표현을 하는 광인의 모습이죠. 그 광인은 괴로움에 몸서리치며 광기를 부립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화를 내고 난리를 친다는 거죠. 우리랑 뭐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판을 뒤집는 광기가 우리에게도 남아 있습니다. 그 광기가 얼마나 과격했는지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죠.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도 그것을 끊고 도망쳤다고 말입니다. 어마어마한 괴력이죠.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뭘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광기를 다스리는 것은 쇠사슬이나 쇠고랑이 아니라고 말이죠. 쇠사슬이나 쇠고랑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쩌면 그것은 강압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나그네의 옷을 벗기기 위해 비바람을 동원하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다른 회유책도 동원하겠죠? 돈으로 무마하거나 감언이설로 잠깐의 시간을 벌어보려고 할지도 모르죠. 종종 그런 사람 있죠? 자신의 불만을 먹는 것이나 쇼핑으로 잠재우려 하는 이들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해답이 되지 못합니다. 얼마 가지 못한다는 뜻이죠.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추상적인 말보다는 우리의 삶과 직결된 예시가 필요한가요? 자녀들의 예가 좋겠죠? 알 수 없는 자녀들의 행동에 당황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많은 반응이 바로 윽박지르는 것이죠. 화내고 혼내고 체벌하는 것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런 저의 분노는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고 이해하고 감싸안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는 나의 이기심의 발로더라고요. 어디 그뿐입니까? 아이들을 위해 가장 주요한 교육의 형태가 바로 자신 스스로가 변하는 것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을 변모, 변화시키기보다 때론 돈으로, 때론 선물로, 때론 얼치기 여행으로 그것을 덮으려 하는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부모님들 자녀를 위해 무지 애를 쓰시죠? 부끄럽지만 저는 지금 여러분들의 노고에 비하면 형편없는 사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진실은 진실대로 말해야 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위해 교육비 내서 공부를 시킨다고 부모의 도리를 다하는 것은 아니죠. 자녀들의 욕구를 채워주려 원하는 것을 사주고 원하는 여행을 다 다닌다고 해서 부모가 좋은 부모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짜 좋은 부모가 되려면 자식에게가 아니라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자식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좋은 사람이어야 해요. 홀로 있을 때에도,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생각 속에서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죠. 계속 말씀드리지만 자식이 모를 것 같죠? 천만에요. 같이 산다는 것은 무슨 하숙생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몸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저 생물학적 원리뿐이 아니에요. 그 사이에는 우리가 모르는 영적인 통로가 있습니다. 다 알아요. 다 느끼죠. 

 

쇠사슬이나 쇠고랑으로는 안 됩니다. 돈으로나 시스템으로도 안 돼요. 아무리 복지재단을 만들고 교육기관을 차려도 안 됩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학식을 많이 쌓아도 안 됩니다.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속에 좋은 영성이 없으면 아무 효과가 없어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죠.

 

누가복음서 8:29a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저는 이 부분이 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문장은 앞 절을 받아서 기록한 것 같은데요. 앞절은 이미 아시다시피 광인이 괴로워하는 장면이었죠. 그런데 이 문장은 그 괴로움이 이미 예수께서 귀신에게 나가라로 명하셨다는 설명을 합니다. 이것이 그 거라사 광인을 만나서 기록에는 없지만 귀신을 꾸짖으셨다는 말씀인지, 아니면 이전에도 이런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렇게 꾸짖으셨던 것을 귀신이 기억했다는 말씀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게는 이 구절이 새롭게 다가왔어요.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아도, 그저 예수님을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귀신은 위축이 되었다는 거죠. 이는 예수께서 빛이셨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좋은 분이셨기 때문이라는 거죠. 영성이 맑았고, 생각이 유연했으며, 늘 여유롭고 평화롭고 기쁘고 감사하고 염려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앞에 어둠이나 문제나, 나를 어렵게 하는 것들이 무릎을 꿇는다는 거죠.

 

좋은 사람이 되세요. 모든 문제의 해결은 남이 어떻게 하느냐도, 상황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도 아닙니다. 내가 흔들리지 않는 영성의 좋은 사람이면 됩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랑과 은혜로 채워지면 됩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알고 그 기대로 오늘을 살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들은 그 앞에 저절로 굴복할 줄 믿습니다. 빛 앞에 어둠이 굴복하듯이 말입니다. 오늘도 빛의 자녀로 사는 우리 가족들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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