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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76 - 거라사의 광인은 주님을 떠난 바로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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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8:26~28   그들은 갈릴리 맞은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 닿았다.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마을 출신으로서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집에서 살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서, 그 앞에 엎드려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하루는 마치 1980년대로 돌아가 그 아프고 쓰린 시절이 트라우마처럼 고통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그 아픈 역사를 알지 못하는 세대들이 많겠죠? 그럼에도 세월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성숙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죠. 그러나 똑같지는 않습니다. 조금이나마 변하고 조금 더 진보한 되풀이임을 믿습니다. 그렇게 또 다른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겠죠. 낯 부끄러운 하루가 오히려 활짝 웃는 천년을 가져다줄 것을 믿으며 오늘도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시길 빕니다.

 

오늘 [거라사]라는 지명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된 본문의 에피소드를 '거라사 광인 이야기'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런데 거라사라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공관복음서 내에도 같은 이야기 속에 지명 이름이 다르기도 하죠. 그러나 정황으로는 갈릴리 동편 마을로, 지금 지명으로 쿠르시라는 곳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죠. 이미 그곳을 거라사 광인 이야기의 배경으로 인식하고 기념하는 건축물들이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좀 독특합니다. 이해 못 할 일들의 연속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메시지를 찾기 위해 문학적 소양을 동원해야 합니다. 이 에피소드에는 많은 해학과 풍자가 넘치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거라사에 가셔서 한 '사람'을 만나십니다. 이 '사람'은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풍랑을 뚫고서까지 거라사에 가신 이유가 바로 이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사람'은 일개의 사람이라기보다 무언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무엇을 대표하는 사람일까요?

 

본문은 그 실마리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그는 귀신이 들렸다고 말이죠.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아직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이 추상적이라면 그다음 나오는 구절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태가 등장하죠.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았고, 집에도 살지 않았으며, 주로 무덤에서 지냈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죠. 대충 우리는 정신이 나가거나 환상, 혹은 환청을 듣는 분열증 환자에게서 이와 비슷한 상태를 곧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귀신 들렸다는 말이 곧 정신분열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죠. 

 

그런데 저는 그런 해석은 좀 좁은 시각이 아닐까 싶어요. 이미 우리는 이 '사람'이 무엇인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로 했죠. 그렇다면 조금은 범위가 넓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실 것이 있으셨다면, 그것도 갈릴리를 가로질러 와서까지 그러셨다면, 어떤 특정한 부류보다는 조금 더 큰 범위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의 의견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인과는 차이가 있죠. 그런데 굳이 옷일까 싶은데요. 옷은 보이는 것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수치를 가리기도 하죠. 어쩌면 이 사람은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집에 있지 않았다면 기초적인 공동체, 가정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죠. 더 나아가 무덤이 마치 자신의 거처처럼 여겼다는 것은 뭔가 음침하고 우울한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어쩌면 이는 부정적인 생각과 나쁜 마음의 표상일지도 몰라요. 이렇게 해석한다면 그는 어쩌면 본래의 자리를 떠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죠. 기억하시나요?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들이 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나눴던 묵상을 말이죠. 사람은 사람답게, 자연은 자연답게, 모든 질서가 창조의 질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요. 그것을 위해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하사 죄로 묶인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만드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단순한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우리들을 표현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부끄러움과 수치를 모르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태도에 급급하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렇게 21세기 우리는 지금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은 동화 속 이야기를 현실에서 보고 있기도 하죠. 뿐만 아니라 늘 날을 세우고,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굴복시킬까 하는 음침한 생각에, 언제나 잘 될 것보다는 안 될 것에 더 목을 매며 스스로 괴로움과 외로움에 빠져드는 그 모습이 딱 지금 우리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이를 성경은 '죄인'이라고 부르죠. 죄는 마땅히 가야 할 과녁이 아닌 길을 벗어난 화살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거라사의 광인은 주님을 떠난 바로 나입니다. 우리가 놀리며 더러워하고 비난하는 그 미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품지 못하고, 알기는 알아도 행하지 못하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에요. 저기 먼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마음을 채워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판단과 인식은 정상적인 것 같아도 정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길을 잃으면 어린아이들도 다 알만한 것을 알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광인 같은 행동을 하게 되죠. 그러고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그런 광인의 모습을 우리는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혀를 차며 비난만 하지 마세요. 우리도 언제든 그 모습 그대로 행동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과 생각에서 사라지는 순간에 말이죠. 그러니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부끄러움을 알고, 내 자리를 알며, 내 생각과 마음을 따스한 빛 아래 머물게 하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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