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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18 -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새로운 부대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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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5:36~3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서, 낡은 옷에다가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그 새 옷은 찢어져서 못 쓰게 되고, 또 새 옷에서 떼어낸 조각은 낡은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다가 넣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릴 것이며, 그래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오늘은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새로운 부대가 되세요]라는 제목으로 주님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본문은 너무도 유명해서 안 쓰이는 데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말씀이죠. 주로 새로운 변화나 개혁에 관한 주제를 다룰 때마다 등장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용은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알만한 내용이죠. 그래도 설명을 하자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2가지 맥락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새 옷과 낡은 옷에 대한 내용이죠. 낡은 옷을 깁는데 새 옷의 한 조각을 잘라내 깁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일단 낡은 옷을 위해 새 옷을 버리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낡은 옷에 새 옷 조각을 깁는다고 그게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새 옷 천이 낡은 것과 대조를 보이기 때문이죠. 이 말씀은 새 옷과 낡은 옷은 공존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이죠. 오늘은 읽지 않았지만, 오늘 본문 이전의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꼬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이야기냐면, 세례요한의 제자들을 보니까 그들은 맨날 금식하고 기도하고 경건하게 금욕생활하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늘 몰려다니며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우리는 우리의 시선이 늘 비교 의식에서 출발한다는 문제점에 대해 묵상을 나눈 바 있죠. 그런데 그들의 시선은 단순히 경건함과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금식으로 대변되는 율법주의, 그러니까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율법의 관점에서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와 먼 유대인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 우리들에게도 이런 인식은 판을 칩니다. 이 정도는 돼야 교인이고 저 정도는 되어야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죠. 어디 교회만 그렇겠습니까? 이 정도 학교는 졸업해 줘야 지식인 취급을 하고, 저 정도 명품은 입어줘야 인격적으로 대합니다. 우리가 가진 관습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해석하는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죠.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시작하신 동기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옛 관습, 그러니까 율법과 같은 제도와, 새로운 진리, 새로운 질서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즉 새롭고 산길을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시키며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며 이 말씀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말씀의 틀은 율법과 예수, 옛 계명과 새 계명, 더 나아가 옛사람과 새 사람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오늘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라면 첫 말씀은 율법과 예수님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죠. 이는 율법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새로운 해석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죠. 그런데 니고데모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되묻죠. 어떻게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말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서 3:6~8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다시 말하면 육은 변하지 않지만 영이 변하면 그것이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물은 변하지 않아요. 여기 칼은 만들어진 이후 계속 칼입니다. 그러나 그 칼을 바라보는 관점은 변합니다. 내가 남을 해롭게 사용하면 해로운 칼이고 남을 이롭게 사용하면 생명을 살리는 칼이 되죠. 거듭남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겁니다. 아이들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 진짜 아이들이 싫겠습니까? 아이들 치다꺼리하는 것이 귀찮다는 말이겠죠. 그런데 아이들을 사랑하면 그 치다꺼리조차 행복할 때가 있어요.


우연히 유튜브 영상을 보았습니다. 거기엔 영상 짤이라고 하죠. 어떤 티비 프로그램 중 한 대목이 나왔습니다. 제가 그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어서 어떤 프로그램인지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대충 보니 이혼 위기 가정이 나와서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인 것 같더라고요. 제가 본 장면은 한 엄마가 아이를 차에 태우는 장면이었습니다. 쌍둥이더라고요. 카시트에 태우는데 아이가 불편한지 짜증을 냅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심하게 꾸중하더라고요. 제가 순화해서 꾸중이라고 했지, 실제는 욕설이 난무했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그것을 같이 보던 출연자들이 있었습니다. 진태현이라는 남자 배우에요. 실제로 이 배우는 부부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죠. 그런데 이 배우가 이런 말을 해요. 자신은 아이를 카시트에 태워보는 것이 꿈이었다고요. 그런데 2년 전에 아이가 출산을 며칠 앞두고 유산했데요. 그 녹화하는 날이 그렇게 딸을 하늘나라로 보낸 지 2주기 되는 날이래요. 그러면서 카시트에 아이를 태우며 욕설하는 엄마를 향해 그래요.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고요. 자신은 카시트에 태우는 것만으로도 부러웠다고요. 직접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영상을 찾아왔습니다.

 

https://youtu.be/Nk0-RbBIP14?si=xBommtcBEL8fhfcM


어떤 이에게는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는 것이 귀찮고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그것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부럽고 고맙고 감사한 일이 되기도 하죠. 똑같은 일이지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비유는 더욱 그 의미를 명확히 하죠. 이번에는 포도주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시피 포도주는 숙성의 시간을 가지죠. 그래서 포도주는 오래된 것일수록 비쌉니다. 보통 포도주를 저장하는 방법으로는 커다란 오크나무통을 떠올리시겠지만 그 방법은 17세기난 들어서 사용했던 방법이고요. 예수님 당시에는 포도주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담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포도주라기보다 포도즙에 가깝죠. 그렇게 즙이 주가 되기 위해서는 발효를 하는데요. 여기서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죠. 이 때문에 가죽이 팽창합니다. 염소 가죽은 신축성이 있어서 늘어나죠. 그래서 보관하기 쉬웠던 겁니다. 그런데 다 늘어난 가죽부대에 새로운 포도주를 담으면 어떻게 될까요? 신축성을 잃은 가죽부대는 터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이런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하신 의미를 찾아야겠죠. 이 말씀에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 해석을 위해 이런 질문을 한번 해 보죠. 새 옷과 낡은 옷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죠. 이를 대비하여 새 술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자고요. 그러면 부대는요? 우리가 되겠죠? 그런데 우리는 새롭지 않죠. 어쩌면 늘어날 대로 늘어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새로운 주님을 담아야 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어쩌면 니고데모와 같은 생각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내가 새로워지려면 죽었다 다시 태어나야 하나? 그런 생각 말이죠. 나이가 들수록 이런 생각은 더욱 커질지도 모릅니다. 내 몸은 이미 늙었는데 어떻게 새로워지나? 내 습관은 이미 고정되었는데 어떻게 고치나? 본래 이렇게 태어난 것을 어떻게 바꾸나? 그런 숱한 생각 속에 빠질지도 몰라요.

 

사실, 니고데모의 이 고민을 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고민이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깊이 생각하면 이 고민이 얼마나 깊은 고민인가를 깨달을 수가 있어요.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 대충 받아요. 그러니까 나에게 새로운 것이 올때 새 것에만 집중한다고요. 새로운 사람, 새로운 선물, 새로운 기회, 여기만 집중하죠. 나는 새로워질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합니다. 새로운 것만 받으면 내가 새로워지는 줄 알죠. 그런데 새로운 포도주를 받으려면 새로운 가죽 부대가 필요합니다. 니고데모는 적어도 그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는 내가 새로워질 방법을 찾았던 겁니다. 니고데모는 우리보다 한참 나은 사람인 거죠.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받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내가 그 새로운 것을 받을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데는 관심이 없으니까요.


최근에 기도하다가 갑자기 주신 생각이 있었어요. 마치 주님께서 제게 질문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질문은 이랬어요.

 

“네가 다시 인생을 산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하고 싶은지 3가지만 말해봐”

 

지금 여러분께도 이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여러분에게 다시 인생이 주어진다면, 여러분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것을 먼저 하고 싶은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저는 그 질문 앞에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대답을 적었습니다. 첫 번째, 제가 다시 인생의 기회가 있다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제가 읽고자 하는 분야의 책들이 많은데 이게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이것을 읽으려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제가 영어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특별히 유튜브에는 수많은 강의가 넘쳐납니다. 한국말로 된 영상보다 영어로 된 영상은 몇천 배 더 많죠. 영어를 잘한다면 저는 훨씬 넓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두 번째는 운동을 열심히 할 겁니다. 어려서부터 체력을 잘 쌓아둘 것 같아요. 젊었을 때는 잘 모르죠. 운동을 하지 않아도 별문제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나의 몸은 내가 한 만큼, 내가 가꾼 만큼 자랍니다. 화초가 그래요. 꾸준히 물을 주고 가지를 쳐주며 관리를 해야 튼튼하게 자랍니다. 열매도 맺는 법이죠. 마지막 세 번째는 비밀입니다. 오늘 주제와는 관계가 없어서 하나쯤은 비밀로 남겨두겠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적고 며칠 동안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질문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어요. 다른 응답이 없어서 조금씩 허무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죠. 제가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더욱 후회가 몰려왔습니다. 왜 어릴 적에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싶은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게 후회하고 있던 어느 날 새벽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음성이라고 하니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제게 주신 통찰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단어일 것 같네요. 그래도 설교니까 좀 드리마틱하게 각색해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제게 물으시더라고요. “무엇을 할지 정했니?” ‘네, 정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다시 물으시더라고요. “그렇게 되기를 원하니?” 저는 너무 놀라고 흥분되어서 바로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던 대답을 들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되도록 해 주마!” 저는 내일 아침 30~40년 전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어요. 자고 일어나면 10살, 20살로 되돌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저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더라고요. 그 새벽은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게 뭔가? 싶은 생각에 불평하면 하나님께 따졌어요. 왜 아직도 그대로냐고 말이죠. 그랬더니 또다시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들은 방법은 이것이었어요.

 

“지금, 그것을 해라! 지금도 안 늦었어. 영어공부를 시작해. 운동을 시작해. 지금도 늦지 않았어.”


저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내 꿈, 내가 하고자 하는 것, 후회스러운 일까지도 시간을 돌려야만 가능한 일인 줄 알았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처럼 다시 태어나야만 가능한 것인 줄 알았거든요. 언제나 내 머릿속에는 지금은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돌려야 가능하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 가능한 일이라고만 여겼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격언이 있죠. 거듭난다는 것은 이 격언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 늦었으니 틀렸다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이 거듭남이라고요. 다시 태어날 수 없는 현실에 낙담하거나 정신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는 것이 거듭남이에요.

 

늘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라고 하니까 가슴이 턱 막히시죠? 1등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뭐든지 잘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에요. 제가 말하는 공부는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작업을 멈추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가령 누가 어떤 말을 합니다. 그것을 배우려면 들어야 하죠. 그런데 그것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들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이죠. 해보니 필요 없다는 관습입니다. 그렇게 계속 반복해 오던 익숙한 관습이 나로 하여금 공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관습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여정이라고 하죠. 여정이 무엇입니까? 여행의 과정을 뜻하죠. 여행이란 내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겁니다. 그렇게 새로운 길을 가는 거예요. 인생이라는 것이 늘 새로운 길을 걷는 거죠. 오늘도 우리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삽니다. 우리에게 오늘은 모두 다 처음이죠. 그렇다면 오늘을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늘을 어제로 착각합니다. 한번 살아본 어제처럼 오늘을 살죠. 그래서 새로움이 사라지는 겁니다. 어제가 오늘을 변질시키는 거죠. 우리에게 익숙한 관습이 새로운 시간을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만들듯이 말입니다. 이게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늘 한 발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새로움을 보는 자들에게만 가치가 있죠. 다가올 시간을 기대하는 자에게만 믿음은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울 줄 알아야 하죠. 

 

오늘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 미래를 다 안다고 여기지 마세요. 관습에 묶여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삽니다. 과거에 묶인 이들은 늘 똑같은 하루를 살아요. 먼저 새로운 가죽 부대가 되세요. 매일, 매 순간,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마음을 가지세요. 어제는 못 했어도 오늘은 할 수 있다고, 어제는 실패했어도 오늘은 성공할 수 있다고, 어제는 몰랐어도 오늘은 알 수 있다고, 그 일이 매번 반복되어도 여전히 오늘은 나에게 새로운 하루, 새로 주실 은혜, 새로 주실 몸, 새로 주실 생각으로 가득 찰 것이라는 믿음으로 출발할 때 내 안에 담긴 포도주가 보배롭고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늘 공부하세요. 공부하듯 새로운 것을 찾으세요. 오늘도 똑같겠지? 그러면 그렇게 똑같은 시간 속에서 늙습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사세요. 공부하듯 오늘을 사세요. 그게 거듭남입니다. 기억하세요. 은혜는 새로워서 낡은 가죽 부대에는 담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복은 새로워서 낡은 사고에는 오히려 독이 되죠. 그래서 이해를 못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새로운 부대가 되세요. 복을 담기 위해 새로운 영성이 되세요. 매일 새로운 시간을 사는 여러분에게 새롭게 주시는 은혜가 온전히 담기고 채워지는 역사가 충만해지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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