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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79 - 시기와 질투를 버리는 방법은 오직 이해와 사랑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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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4:23~24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8월의 첫 주간을 잘 보내고 계신가요? 8월답게 연일 폭염주의보가 발효되고 있네요. 에어컨 환경 조절 잘하셔서 기온차로 인한 건강문제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빌며 오늘도 날은 뜨거워도 마음은 시원한 복된 하루 되시길 빕니다.

 

예수께서 지금 나사렛에서 사역을 진행하고 계시죠. 나사렛은 예수께서 자란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좀 시큰둥하죠. 왜냐하면 예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가 변변찮은 목수 집안에서 자랐고,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부려먹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참고로 당시 목수라는 직업은 오늘날과는 달리 어떤 능숙한 전문직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농사 지를 땅이 없어서 할 수 없이 택하는 직업처럼 여겨졌죠. 당연히 사회적 지위는 하층에 속했습니다. 일부 학자들 중에는 허드렛일을 하는 종처럼 여겨졌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죠. 그러니 무시를 당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마음이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말로 대변되었던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모두가 알만한 속담 하나를 말씀하시죠. 그 속담은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였습니다. 이는 '자기 병도 못 고치면서 무슨 남의 병을 고친다고 그래'라는 비아냥이 섞인 말이죠. 시쳇말로 '너나 잘하세요'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이런 말씀도 하시죠.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이는 이런 뜻입니다.

 

'가버나움에서 무슨 이적 같은 것을 행했다며? 그런 것이나 좀 보여줘 봐'

 

다르게 표현하면 그런 말이죠. '말씀은 됐고, 이적이나 베풀던가!', '닥치고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줘' 뭐 그런 말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죠.

 

이미 우리는 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지의 단면을 어제 묵상한 바 있죠.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어릴 적 코 흘리개를 기억하고, 때론 미성숙할 때의 일도 보았죠. 너무 잘 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에는 늘 '다 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이것이 선입견과 편견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생각은 늘 자라지 않습니다. 성장하는 법이 없죠. 어릴 적 모습, 미성숙한 상태의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실제 했고 또 그것을 보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입견과 편견은 그때에서 한치도 자라지 않죠. 그 모습 그래도만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성장하고 성숙했을 시간들은 계산하지 않죠. 심지어 자신은 자랐고,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도 남은 내가 보았던 옛날 그 상태로 기억이 멈추는 놀라운 마법을 우리는 부립니다. 남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남의 성장을 기대하지 않는, 기다려주지도 않는 이기적인 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사실 잘 모르는 사람, 과거를 알지 못하고 가깝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리 인색하지 않아요. 유독 우리는 잘 아는 사람, 가까이 있었던 사람에게 가혹하기도 하죠. 주로 이런 말을 많이 하죠. '니가 뭘 하겠어?' '니가 해봤자 거기서 거기지' 때론 이런 비하는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잘 알면 잘 알수록 신기할 정도로 우리는 무시하는 경향들이 다분하죠. 왜 그럴까요?

 

나와 관계가 없는 이들보다 관계가 있고 잘 아는 이들에게 가혹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시기와 질투는 주로 나와 관련된, 내가 아는 사람에게서 작동하기 때문이죠. 나랑 같이 자랐는데 나보다 나은 것을 인정하기 힘든 것입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아니 오히려 나보다 못했는데 나보다 성숙하고 가르치려는 꼴은 도저히 못 봐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왜 고향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하셨는지 그 이유를 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시를 받는 일들이 사역 초반에 왜 기록되었는지도 잘 몰라요. 다만 어제와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게 주신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 초반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주님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나의 첫 사역에 관한 것이라고 말이죠. 바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버리고 개선해야 할 점을 보여주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는 것이고, 시기와 질투를 버리는 일이라고 말이죠. 

 

오늘은 가까이 있는 이들을 칭찬하고 존귀히 여겨 보시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나와 나의 가족, 나의 동료들, 괜스레 가까이 있고 잘 알아서 더 밉고 보기 싫은 이들을 축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서 시기와 질투를 버리는 방법은 오직 이해와 사랑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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