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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여호수아서묵상

여호수아서묵상일기 95 - 조금만 더 친절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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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 22:30 ~34  제사장 비느하스와 회중의 대표자들 곧 그와 함께 간 이스라엘의 천천만만 백성의 가문 대표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동쪽의 므낫세 자손의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동쪽의 므낫세 자손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이번 일로 주님께 반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알았소. 이제 당신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주님의 손에서 건져 내었소."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와 백성의 대표들이 길르앗 땅에 있는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을 만나 본 다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 보고를 듣고 기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의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래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거주하는 땅으로 쳐 올라가서 그들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이 단을 일컬어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우리 모두에게 증명함'이라고 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새로운 하루를 밝은 미소와 따뜻한 심장으로 시작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품은 새로운 마음이 오늘을 만드는 동력이 될 것을 믿어요. 그러니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을 기도와 감사로 따뜻하게 데우시길 기도합니다.

 

마침내 요단강 동쪽 편 지파인 르우벤과 갓, 그리고 므낫세 절반 지파의 제단 사건이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훈훈한 마무리죠. 크게 오해를 한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은 사절단을 보내어 사건의 자초지종을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인 요단강 동쪽 지파들은 성심을 다해 자신들의 의도와 뜻을 전하죠. 그 결과 서로 이해를 합니다. 더욱 눈길이 가는 것은 그런 서로의 대화를 통해 이들 사이에 이전보다 더 깊어진 애정이 느껴진다는 점이죠. 30절에 '기뻐하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흡족했다는 뜻이죠. 사실 이전에 험악했던 분위기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분위기입니다.

 

다 읽고 보니 좀 허무하죠? 오해와 해명, 그리고 없었던 일이 된 사건입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허망하기까지 한, 그야말로 해프닝이죠. 계속 말씀드리지만 이런 사건을 이렇게 진지하게 오래 기록할 필요는 없어 보이죠. 그럼에도 우리는 많은 묵상을 나눴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건이 기록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위에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았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도 그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가끔 친구들이 다툼을 할 때가 있죠. 싸우고 난 후에 더 친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친구는 싸워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요즘은 말도 조심스럽고, 또 예를 들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시대여서 서글프지만 이전 낭만이 흐르던 시기에는 투닥거리다가 낄낄거리는 친구들의 모습이 많았습니다. 서로 화해한 후에 더욱 돈독해지는 경우들이었죠. 그래서 옛말에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보다, 어떤 일이 있고 난 후에 어떤 마무리를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죠.

 

죄를 묵상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미 여러 차례 드렸습니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요하게 보시는 것이 우리가 '죄를 지었나 안 지었나'가 아니라 죄를 지은 이후 어떻게 그 죄를 처리하고 그다음 스텝을 어떻게 내딛느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것을 책망하시기보다 죄를 지은 이후 그 처리에 대한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회개라는 것이 있고, 그래서 주님은 용서에 큰 의미를 두시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보다 깊은 교제 후에 일어나는 기쁨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이 기록된 여호수아서 22장 전체의 맥락을 보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보입니다. 비록 오해였지만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은 분노했었죠. 그들이 생각하는 요단강 동쪽 지파들은 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반역한 이들을 처벌하자는 의견도 다수였습니다. 우리가 감정에 휩싸이면 이보다 더한 행동도 불사하죠. 그런데 그들은 자제했습니다. 그리고 사절단을 보내서 차분히 상황을 파악하는 방법을 선택하죠. 아시다시피 우리가 감정에 치우치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내 머릿속에 결론이 나 버리면 확증편향을 갖게 되죠. 이런 상태에서 대화는 무의미해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의 대응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죠. 그들은 모든 감정과 결론을 내려놓은 채 대화를 시도합니다. 일종에 무죄의 원칙을 적용한 거죠. 이게 참 중요합니다. 우리는 싸우려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화는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대화를 시도할 때 나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내 주장을 하려고 대화를 하면 접점을 못 찾습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대화를 시작해야 그 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메시지 하나가 그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가 자제와 대화 시도였다면 요단강 동편 지파들은 성실한 해명으로 대응하죠. 이것 또한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보통 우리는 오해를 하고 묻는 상대방에게 먼저 실망을 합니다. '나를 오해해?' 뭐 이런 태도죠. 그래서 적절한 해명을 못합니다. 아니 아예 안 하죠. 그래서 싸움은 거칠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실하고 친절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대화에는 이게 필요하죠. 나의 입장에서 변명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해명을 해야 합니다. 조금 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죠. 이러려면 나의 스타일 가지고는 안 됩니다. 보통 내가 하던 방식으로는 가능하지 않죠. 이전의 나보다, 본래의 나보다 조금 더 친절해야 합니다. 조금 더 다정해야 하고 세심해야 하죠. 그래야 상대방의 이해를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친절하면 좋겠습니다. 감정이 앞설 때 내 안에 친절을 동원하면 좋겠어요. 친절하게 묻고 친절하게 대답하는 방식에서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조금 더 친절하게 서로를 대하면 어떤 사건이든 결과는 기쁨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정말 대화가 중요한 시기입니다. 가까울수록 친절한 대화가 필요하죠. '다 알겠지' 이러고 넘어가면 안 됩니다. 참 신기한 것은 사람들이 나쁜 것은 나쁘다고 말을 잘하죠. 싫다는 말은 잘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지적질을 하죠. 그런데 좋다는 것은 잘 말을 안 해요. 칭찬에 박합니다. 그때 가진 생각이 이거죠.

 

'그걸 말로 해야 해?' '말 안 해도 알잖아?'  

 

서로에게 기쁨이 되려면 조금 더 친절해야 합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고, 조금 더 상대방의 입장에 서야 하죠. 친절은 상대방의 신발을 신고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친절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죠. 오늘도 조금만 친절하세요. 그 친절은 나에게 기쁨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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