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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여호수아서묵상

여호수아서묵상일기 34 -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내 안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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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 5: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고 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날씨가 참 좋죠? 새벽 공기에서 가을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느낌은 참 단순했던 것 같아요. 아니 편협했다고 할까요? 아침에 추우면 춥다고 투정, 더우면 덥다고 투정하죠. 그런데 적당하고 좋으면 어떠신가요? 저는 대부분 그런 날을 그냥 지나쳤던 것 같아요. 좋은 것을 좋다고 느끼지 못한 거죠. 늘 나쁜 것만 느끼고, 안 좋은 것들만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참 안타깝죠? 그래서 바꾸기로 했습니다. 좋은 것을 찾고 본다는 게 그래요. 아침 공기의 서늘함은 시원함으로, 안개가 자욱한 것은 우중충이 아니라 운치로, 따가운 햇빛은 따스한 햇살로 바꾸는 것이죠. 그것만으로도 나의 하루는 달라지지 않을까요?

 

요단강의 기적을 맛본 이스라엘은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죠. 그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서 며칠을 머물러야 했죠. 우리는 마음이 급할 때가 있어요. 어떤 일을 시작하면 빨리 끝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기도 하죠. 속전속결이 최선인 줄 알고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급한 우리의 마음에 여유를 가르치시죠. 잠시 쉬어가도록 이끄십니다. 가끔은 몰아치는 감정에 시간을 줄 필요가 있어요. 단숨에 무언가를 끝내버리려는 조급함에서 벗어나 주님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런 이스라엘에 오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슨 가슴을 때리는 멋진 말씀이어서가 아니에요. 한 가지 의문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죠. 물론 그 의문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죠.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었습니다. 식민지배를 받는 것처럼 있었죠. 나라가 없는 설움,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민족적 차별을 받는 아픔은 우리 민족에게도 사무쳐있는 상처죠. 이것이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게 더 크게 다가온 의문은 그다음 말씀이에요. 그 수치를 오늘 없애 버렸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죠. 무엇을 가지고 그 수치가 없어졌다고 했을까요? 과연 어떤 일을 가지고 그동안 받은 수치를 없애 버리셨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래서 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의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이전에는 광야를 지났고요. 이제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몇백 년동안 노예로 살았던 그 설움을 이제 가나안에서 나라를 이루며 살게 되었으니 그 수치가 복으로 바뀌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되죠.

 

그러나 이런 해석에는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이라는 국한된 시간 때문입니다. 물론 이 또한 특정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시간을 종합하여 이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에 대한 개념으로 사용했다면 이 또한 이해가 되는 대목이죠. 그럼에도 저는 '오늘'이라는 말씀이 자꾸 걸렸습니다. 묵상은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고, 그 말씀이 나에게 필요한 것임을 알고 하는 것이기에 저는 조금 무리를 해서 '오늘'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했어요. 그들은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서 기념비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여 오래도록 가슴에 새기기 위함이었죠. 그리고 할례를 행했죠. 이 할례는 시간적 흐름상 생뚱맞은 대목임을 이미 묵상한 바 있죠. 그런데 기념비를 세우고 자손에게까지 이 은혜를 기억하고 전하라는 말씀과 할례를 연결하면 그 할례가 생뚱맞은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돌로 세운 기념비와 함께 할례는 몸에 새기는 기념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본문에서 언급한 '오늘'은 바로 이 기념비,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땅에도, 몸에도 그 흔적을 새기는 그 행위를 가리키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이름을 거론하죠. 성경에서 대부분 지역의 이름이 명명될 때는 그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길갈이라는 이름의 뜻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새 번역 성경의 관주에 보면 길갈이라는 발음이 오늘 본문 '수치를 없애다'라는 대목의 '없애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갈랄]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적어 놓은 것으로 보아서 약간의 언어유희적인 유머가 섞인 명칭이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길갈이라는 명칭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수치를 없애 버리셨다는 의미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나쁜 일, 수치스럽고 되돌리고 싶은 일들, 버리고 싶고 없애고 싶은 일들이 있죠. 억울한 일, 아프고 슬픈 일, 상처들이 우리에게 많습니다. 그런데 그 수치를 없애는 방법이 있다는 거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내 주위에 선포하고, 내 몸에 새기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전화위복이라고 하죠. 나쁜 일이 결국 좋은 일이 되고, 고생이 결국 복이 된다는 의미죠. 그것은 내 마음에, 내 몸에, 내가 사는 오늘에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할 때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본문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의 수치는 싸워 이겨서 당당히 가나안을 차지하고 보란 듯 멋지게 폼 잡는 데서 씻기지 않아요. 더 놀라운 것은 여전히 수치심에 떨고 복수심에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면 그 가나안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가나안을 차지하려면 먼저 그 수치를 털어내야 합니다. 내 안에 감정들을 씻어내야 하죠. 그 일은 오직 내 삶에, 내 주위에, 내 마음과 몸에 주님의 은혜를 새기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으로 나의 아픔을 씻어낼 때 우리 앞에 가나안은 또한 은혜로 주어지죠. 오늘도 싸워 이기기에 앞서 내 몸과 마음에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시작하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그때 가나안의 길이 열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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