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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여호수아서묵상

여호수아서묵상일기 32 -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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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 5:2~3   그때에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돌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시 할례를 베풀어라." 그래서 여호수아는 돌칼을 만들어 기브앗 하아라롯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저녁으로 기온차가 심합니다. 계절이 바뀌는 과정은 뭔가 애매하죠. 그날 어떤 옷을 입을지, 추울지 더울지, 맑을지 흐릴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장단에 나를 맞출지 헛갈리죠. 이럴 때 우리는 몸이 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다른 계절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계절과 이별을 해야 하고, 오는 계절을 맞이해야 하죠. 아무리 지난 계절이 발목을 잡아도 벗어나야 하고, 오는 계절이 아직 손에 잡히지 않아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몸을 지키는 일이고 온전한 태도죠. 오늘도 새벽 공기는 차네요. 두툼하게 옷을 챙겨 입으시고 코끝을 스치는 차가운 가을 향기를 즐기며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길 빕니다.
 
어릴 적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미국 소설가 에드가 버로스가 쓴 소설, [타잔]이죠. 이 책은 너무도 유명해서 당시 제 또래 아이들은 거의 다 읽을 만큼 좋아했죠. 그래서인지 드라마로도,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어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입니다. 다 아시는 줄거리지만 요약하면, 어린 소년을 동반한 가족이 여행을 떠났다가 난파를 당해 그 어린 아들을 정글에서 잃고 말죠. 그 아이는 정글에서 원숭이들의 보호를 받으며 원숭이처럼 살았습니다. 다른 원숭이들과는 다른 피부색과 모습을 가졌지만 원숭이들과는 달리 도구를 사용할 줄 알았고, 판단력이 뛰어나서 원숭이 사회에서는 늘 주목을 받았죠. 그 때문에 때론 부러움을 사고, 때론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타잔의 삶은 그저 어김없는 원숭이였죠.

소설의 마지막은 타잔이 구출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요.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타잔에게는 그것이 기쁠 수만은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았기에 돌아온 집에 적응할 수가 없었던 거죠.

타잔이 원시 밀림에서 빠져나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숭이처럼 살다가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집으로 돌아왔고, 부모의 품에 안겼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죠. 그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그렇게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거기서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바로 옛 습관과의 싸움이죠.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돌아온 집은 감옥이 됩니다. 옛 습관을 바꾸지 못하면 아버지의 품은 귀찮은 간섭이 되죠. 새로운 집, 문명사회에 왔다고 타잔이 사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지가 얼굴이 똑같다고 왕자가 되는 것도, 왕자가 왕궁을 벗어났다고 거지가 되는 것도 아니죠.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져 왕비가 되는 장면은 아름답고 멋지지만, 책에 담지 못한 신데렐라의 왕비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노예처럼 살던 삶을 버리고 왕비처럼 사는 삶으로 바뀌는 데는 자신의 옛 습관들을 버리는 과정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신분이 달라지려면 옛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아니 싸워야 합니다. 나를 지배하던 옛 가치관과 싸워야 새로운 자리에 들어갈 수 있죠. 오늘 본문은 할례를 받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할례는 유대 민족의 전통과 같은 종교적 행위입니다. 이 출발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언약과정 속에서부터 시작되었죠. 오늘날 할례는 의학적으로 무용론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할례는 그 의미를 영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데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죠. 그 의미가 바로, 할례로 표피를 잘라버리듯 나를 덮고 있던 구습과 절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집트의 노예근성을 버려야 비로소 새로운 시대를 자유로 열 수 있고, 죄의 지배를 버려야 은혜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옛 습관과 싸우는 나의 수고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간혹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의아해하죠. 어떤 이는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주신 것일까?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주신 것이 나와 안 맞을 때가 있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믿었던 시작이 안 좋은 결과로 끝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안 좋게 끝나는 경우도 있죠. 이럴 때 우리는 좌절하기도 하고 불신에 휩싸이기도 하죠.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새로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여전히 옛 습관대로 받는 나의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고요. 하나님은 자유로운 가나안에서 뛰어놀 선물을 주셨는데 나는 여전히 이집트 노예로 그 선물을 받으면 어떨까요? 같은 선물도 완전히 다른 선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려면 나의 생각을 덮고 있던 옛 가치관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새로 태어나듯 말이죠. 그래서 새로 태어남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새로운 날을 맞이했어요. 여전히 어제의 나로 오늘을 살면 오늘도 어제처럼 우중충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은 오늘처럼 사세요.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기분으로, 새롭게 쓰는 시간을 사세요. 오늘은 우리가 모두 처음 경험하는 시간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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