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6:1~4 성도들을 도우려고 모으는 헌금에 대하여 말합니다. 내가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지시한 것과 같이, 여러분도 그대로 하십시오. 매주 첫날에, 여러분은 저마다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따로 저축해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갈 때에, 그제야 헌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로 가게 되면, 그때에 여러분이 선정한 사람에게 내가 편지를 써 주어서, 그가 여러분의 선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겠습니다. 나도 가는 것이 좋다면, 그들은 나와 함께 갈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밤 어둠 가운데 어제의 상심과 낙심, 실수와 반복된 죄들을 묻어버리고, 이 아침 하늘이 밝은 것처럼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빛으로 시작되는 하루이길 빕니다. 어제의 근심을 오늘 아침까지 끌고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오늘 주시는 은혜로 사는 믿음의 가족들 되세요.
이제 고린도전서도 마지막 장에 이르렀습니다. 서신의 마무리인 만큼 바울은 인사와 함께 실제적인 부탁들을 나누는데요. 그중에 첫 번째는 헌금에 관한 것입니다. 헌금에 관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저는 매우 어렵습니다. 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것 같은 생각 때문일까요? 그래서 말씀 가운데서도 헌금에 대한 묵상은 극히 나누기를 꺼려하는 모습이 제게 있습니다. 그렇다고 헌금과 물질에 대한 철학이나 생각이 없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런데도 입 밖으로 잘 안 나옵니다. 이를 저는 쿨하거나 세련된 모습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겁한 외면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아요. 또한 돈에 관한 부분을 유치하거나 저급하다고 여기는 잘못된 관습도 내 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쉽지 않고, 피하고 싶은 마음을 털쳐 버리지 못하는 연약함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만 오늘은, 말씀에 기대어 평소 저에게만 적용했던 헌금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과 생각을 짧게나마 담담히 나눠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뿐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에도 헌금을 부탁했던 모양입니다. 이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기근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큰 기근이 글라우디오 황제 때 들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그래서 각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십시일반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을 위해 헌금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다림교육이라는 교육적 재능기부 기관을 운영하고 있죠. 교육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필요한 이들이게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매년마다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자발적 나눔을 하겠다고 참여합니다. 올해도 벌써 50여 명의 새로운 기부자들이 나타나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고 있죠. 그분들이 다림교육에 문을 두드리면 맨 먼저 멘토 교육을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부터 어떤 마음으로 함께 해야 하는지 주의사항들을 나누죠. 그중에 제가 맡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자발적인 재능 기부를 시작한 동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죠. 다림교육은 종교적 기관이 아니기에 종교색을 띠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교육기관이 세워진 목적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죠. 그 목적이라 함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공평'입니다.
공평은 물리적으로 하나님께서 똑같이 나누고 똑같이 갖는 방식으로 실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평은 우리에게 맡겨진 우리의 사명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각자 모두 다르게 태어납니다. 가진 재능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죠. 재능도, 부유도 다 높낮이가 있고, 많고 적음이 있습니다. 얼핏 불공평해 보이죠. 어떤 이는 금수저로, 어떤 이는 흙수저로 태어나죠. 어떤 이는 돋보이는 재능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평범합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기에는 공평하지 않은 차이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공평에 대한 착각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평은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시스템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가진 재능과, 남보다 더 가진 것들을 나누며 일치를 만드는 것이 공평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직업 대부분이 이런 공평의 원리를 가지고 있죠. 교육 재능이 있는 교사는 학생을 가르치며 공평을 이루고, 의료적 재능의 의사는 환자를 돌보며 공평을 이룹니다. 그들은 서로가 나누며 살죠. 만약 아무리 뛰어난 학식이 있어도 나눌 학생이 없으면 가치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 있어도 환자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듯이 말이죠. 우리의 이웃 사랑은 이 공평의 원리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공평의 원리는 헌금의 원리에도 적용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12지파로 나뉘어 기업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중에 레위지파는 기업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다른 지파들은 자신의 소득의 1/10을 나누도록 했죠. 이것이 십일조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십일조를 어디에 써야 하는지, 레위지파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이 헌금은 하나님의 공평을 이루는 우리들의 거룩한 제도였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종교적인 관습에 비추기보다 창조의 원리로, 그리고 공평의 원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이 저는 중요하다 여겨요.
더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았습니다. 그것은 나의 십일조, 그러니까 남을 위해 나눠야 할 몫이 '덤'이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나누는 것이 나의 것인 줄 알아요. 내가 마땅히 가져야 할 몫을 나누는 줄 압니다. 그러니까 아깝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가져야 할 것보다 1/10을 더 주십니다. 이를 믿든 안 믿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손에 넣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남을 위해 나눌 몫을 덤으로 주시죠. 우리는 그저 우리게 주신 덤을 나누는 심부름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의 것으로 알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기는 거죠. 소위 교회의 지도자들이 간혹 헌금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다는 과격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과격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닙니다. 이것이 덤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면 말이죠.
우리가 나눌 몫을 내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래서 나눌 것을 나누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이런 격이라면 어떨까요?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11,000원을 주었습니다. 10,000원이 나의 몫이고 나눌 몫으로 1,000원을 더 주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다 나의 몫으로 해버리면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고용주는 당연히 더 가져간 피고용인의 몫을 줄이지 않겠습니까? 이제 9,000원을 몫으로, 900원을 나눔으로 주겠죠. 그것마저 자신의 것으로 해 버리면 점점 그 몫은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반대는 어떨까요? 내가 나눌 1,000원을 1,200원으로 늘리면요? 2,000원으로 늘린다면요? 하나님은 나눌 몫을 늘리는 사람에게 주실 몫 또한 늘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너무 극단적인 예죠? 그러나 들을 귀 있는 분들은 들으실 줄 믿습니다. 저는 십일조의 원리가 단순한 돈의 문제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교회에 받치는 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이는 공평의 문제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명의 문제이고, 하나님 원리의 문제임을 아셔야 해요.
모자라다고 여기면 계속 모자란 삶이 됩니다. 돈을 많이 모아도 모자란 사람은 늘 모자라죠. 풍성한 삶은, 내게 주어진 것에 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더 주어졌고, 그래서 나눌 것이 있고, 나누어서 더욱 빛나는 삶임을 아는 사람만이 여유롭고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울수록 더 많이 주시고, 그래서 나눌수록 나의 재능도, 재물도 더 풍성해지는 것이죠.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헌금의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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