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4:27~28 누가 방언으로 말할 때에는, 둘 또는 많아야 셋이서 말하되, 차례로 말하고, 한 사람은 통역을 하십시오. 통역할 사람이 없거든, 교회에서는 침묵하고, 자기에게와 하나님께 말하십시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설렘과 기쁨의 하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신 은혜, 뿌려놓으신 진리들을 발견하고 찾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기도해요.
오늘, 바울은 방언이나 예언에 대해 실제적인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시는 방언과 예언이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오순절 성령 강림 때와 같은 현상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던 것 같죠? 그리고 그것이 오용되기도 했죠. 그래서 바울은 이를 분별 있게 사용하고 질서 있는 행동을 통해 방언이나 예언에 대한 남용과 오용을 방지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협력하는 것이었어요. 방언의 은사를 가진 이들과 이를 통변할 수 있는 이들이 협력하는 것이죠. 그 두세 명이 서로 말하고 통역하는 과정을 거치며 다른 이들에게 유익과 은혜를 끼치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우리의 현실과 조금 거리가 먼 조언입니다. 일단 현재 우리에게는 활발한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들이 작동하지 않죠. 물론 방언이나 예언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당시 고린도 교회처럼 강력하게 겉으로 드러나게 성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인한 부작용도 그리 심하지 않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는 당시처럼 은사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허나 이를 저는 은사가 없어졌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양해지고 더 세분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은사가 우리의 생활 전반에 더 깊숙하게 자리 잡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령, 신유의 은사가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의사도, 병원도, 약도 많지 않았죠. 심각한 병에 걸리면 고칠 방법이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신유의 은사가 발휘되어야 했죠. 그런데 오늘날에는 의학의 발달로 인해서 의사나 병원이 생기고 약으로 많은 치유들이 가능해졌죠. 어쩌면 신유의 은사들은 의료적 재능을 가진 이들을 통해 현재도 발휘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이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이죠.
그래서 저는 방언과 예언에 대한 바울의 조언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죠. 다만 이 하나만큼은 확실한 것 같아요. 어떠한 말도, 은혜도, 사랑도, 협력하고 소통되어야 제 값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가끔 저는 공동체 가족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제 직장을 다니면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직장 내 부조리한 것들이 보이는 겁니다. 때론 상사의 인격적인 문제가 걸리기도 하고, 때론 구조적인 모순이 눈에 보이기도 하는 거죠. 이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면 참겠는데 불합리가 만연하고 옳지 않은 문화가 고착화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마음이 좋습니다. 옳지 않은 것을 보고도 눈을 감지 않고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이 좋아요. 그런데 저는 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해 줍니다.
"지금 그 잘못된 일들을 자네가 말하고 지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말을 회사나 상사가 들어줄까?"
재미있게도 이 역 질문에 한결같은 대답이 나오죠.
"제가 잘리겠죠."
"안 듣겠죠."
그렇다면 왜 말을 해야 할까요? 정작 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시정되고 진정한 건의들이 받아들어지기를 바래서 제안하고 건의하고 시정토록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잘릴 것이 뻔하고, 그런 건의들은 씨알도 안 먹힐 것을 아는데 왜 건의하려는 것일까요? 이런 말을 하면 제게 질문했던 이들의 표정이 굳어집니다. 일단 저에 대한 의심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잠자코 있으라는 건가?' '잘못을, 부당함을, 부조리를 보고도 못 본 척하라는 건가?' 이런 표정이죠.
제가 진심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정말 내 의견, 내 목소리, 내 건의가 소중하게 반영되고 받아들여지고 역사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이죠. 상사와 신뢰 관계에 놓이지 않는다면 나의 말이 아무리 옳아도 그 목소리는 전달되지 않겠죠. 내가 회사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그 문제를 해결할 자리나 권위가 없다면 회사는 그저 지나가는 뭘 모르는 하찮은 졸개 사원 하나의 목소리로 치부하겠죠.
우리가 가진 옳음은 말과 생각만으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그 옳음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폭로하고 떠드는 것으로만 되지 않아요. 내 말이 신뢰받을 만큼 내 자신이 신뢰의 자리에 가야 하고, 내 의견이 존중될 만큼 내 인격이 자라야 합니다. 협력은 그렇게 하는 거죠. 누군가를 이해시키는 데는 많은 수고가 따릅니다. 누군가에게 은혜를 나누기 위해서는 그만큼 교제와 시간이 필요해요. 신뢰를 얻어야 내 말에도 신뢰가 주어지고, 그의 말을 들어주는 시간이 있어야 내 말을 듣는데 시간도 내주는 법이죠. 내 말이 힘이 있으려면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들도 많아야 합니다. 때론 이해와 해석을 덧붙여주는 이들도 생겨야 하죠. 그런 협력의 관계들이 나의 말, 나의 생각을 역사하는 힘으로 만듭니다. 그러니 말하기 전에 협력하세요. 함께하시고 공동체를 이루세요. 친구가 되어줘야 하고, 신뢰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말하는 것이 전달되고, 그래야 내 진심도 통하는 법이니까요.
혼자 정의를 부르짖지 마세요. 먼저 신뢰받는 사람이 되세요. 함께하세요. 정의는, 공의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과 함께 하셔야 합니다. 아니 그들을 만드셔야 합니다. 나 혼자 좋은 복음을 외친 들 그들이 듣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나의 과거입니다. 먼저 함께하며 신뢰를 쌓으세요. 그 신뢰가 나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신뢰가 없는 방언은 미친 사람의 소리지만, 신뢰가 있는 방언은 거룩하고 신비한 음성이 됩니다. 한국 교회가 사회에 외치는 소리가 신뢰 있는 방언이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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