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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104 - 차라리 말없이 함께 울어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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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10~13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뜻이 없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딴 세상 사람이 되고, 그도 나에게 딴 세상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니, 교회에 덕을 끼치도록, 그 은사를 더욱 넘치게 받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방언에 대한 연속되는 말입니다. 바울은 마치 랩을 하듯이 방언을 개념 없이 사용하는 사람들을 디스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서로 이해와 소통이 없는 대화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해요.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대화는 딴 세상 사람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외국어를 한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것을 오래전 우리말로 번역했던 한글개역성경 번역본에는 '야만'이라고 번역해 놓았더라고요. 훨씬 강한 어조죠. 사전적 의미로 야만은 미개하고 교양 없는 무례함이라는 뜻이더라고요. 그러니까 단순히 딴 세상 사람이 아니라 예의 없고, 수준이 낮은 사람이라는 뜻이죠. 

 

이토록 바울이 속사포처럼 힐난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당시 상황이 조금 그려지죠. 아마도 모여서 기도할 때도 툭하면 방언으로 하고, 남을 축복할 때도 툭하면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신비하고 우러러 보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 말이 무엇인지 몰라 점점 답답해하고 정작 방언을 하는 본인도 무슨 말인지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방언이 위화감을 조성했을지도 모르죠. 그러는 사이 공동체의 관계들은 금이 갔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서로 방언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까지 생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방언이 아니면 말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을 수도 있죠. 상상이 되지 않지만 바울이 이처럼 열을 올리면서 길게 말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굳이 추측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는 내 삶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오늘날, 특별히 내가 방언으로 말하고 대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방언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데 제 머리 한편에서 이런 질문들이 올라옵니다.

 

'정말 너는 방언으로 말한 적이 없니?' 

 

그 질문의 '방언'은 다른 의미겠죠? 그러니까 네 말만 하고, 너의 생각만 하고,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한 적은 없냐는 뜻이겠죠. 심지어 설교 할 때도 현실적이지 못한 말과, 나 자신도 적용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은 적이 없는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마음 한편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오네요. 때론 체면 때문에, 때론 과시적으로, 때론 나만의 생각에 빠져 남이 이해할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이론들을 늘어놓았던 적이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설교들을 했던 적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오늘 본문은 저를 향한 바울의 질타임을 느낍니다. 처음엔 '저런 몰상식한 사람들이 있다니..' 했어요. 그런데 제가 그런 몰상식한 사람 중 하나였음을 고백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약 2:15~16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분명히 말은 했는데 현실성 하나 없는 이 말이 방언 아닙니까? 간혹 목사들 사이에서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추임새라는 우스갯말이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인사말이라는 뜻이죠. 이게 방언이 아니고 뭐겠어요? 수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함께 울어주지 못하고 내 경험대로 가르치려 들고 나약한 존재라고 공격하는 말들이 방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가 현실적인 해답을 주기보다 나도 모르는 두리뭉실한 철학이나 공허한 메시지만을 남발한다면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방언 아니겠습니까?

 

오늘 아침 제게 큰 도전과 찔림이 있는 말씀을 대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하며 진리 입네 나만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겠다고요. 차라리 말없이 함께 울어주겠습니다. 차라리 함께 아파하겠습니다. 차라리 곁에 가만히, 조용히 함께하겠습니다. 말보다 더 깊은 같은 마음으로 함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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