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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103 - 조금만 친절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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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6~9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을 전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이 없는 악기도, 각각 음색이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피리를 부는 것인지, 수금을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또 나팔이 분명하지 않은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방언을 사용하기 때문에 분명한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남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주일은 잘 보내셨습니까? 좋은 친구, 좋은 가족과의 만남은 언제나 힘을 얻습니다. 도움을 받으며 기쁘고 도움을 주며 즐거운 신비한 사이죠. 우리 공동체가 그랬으면 합니다.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은혜 안에 거하고, 서로에게 위로를 받으며 치유와 회복의 축복이 임하는 공동체였으면 좋겠어요. 그런 은혜의 공동체 만남이 오늘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 확장되길 원합니다. 주님 주신 은혜와 결단과 고백이 하나씩 실현되는 일주일을 시작하시길 빕니다.

 

바울은 방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길게 이야기합니다. 얼핏 들어서는 방언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는 듯 들릴 정도로 거침이 없죠. 오늘 본문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방언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방언에 대해 왜 이리 열변을 토하는 것일까요?

 

이런 거친 언사 이면에 어렴풋이 보이는 현실이 있습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 주변에 방언으로 말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이 이토록 길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방언이 유행처럼 번진 것이 아닐까 싶어요. 한때 한국교회에도 방언이 무슨 믿음의 표증처럼 행세를 한 적이 있죠? 어느 기도원에서는 방언을 하기 위한 특별 과외를 할 정도였습니다. 교회에서는 툭하면 '너 방언할 줄 알아?' 이 질문으로 모든 것을 평가할 정도였죠. 딱 그 모습이 바울이 마주한 모습 아니었을까 싶어요. 누군가 기도해 달라고 하면 방언으로 기도하고, 회중이 모인 자리에서 같은 기도문으로 기도할 때조차 따로 방언으로 기도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보통 방언으로 기도하는 이들은 목소리도 크죠? 

 

저는 방언이 정말 좋은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묵상했다시피 하나님과의 긴밀한 대화이기 때문이죠. 성령님의 임재로 하나님과의 통로가 열리는 신비가 방언에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 오순절 성령강림처럼 방언이 터지기도 하죠. 그것은 하늘의 문이 열리는 신비로운 일이죠. 문제는 방언을 남들보다 우월한 신앙적 경험으로 자랑하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나의 믿음을 자랑하고자 방언을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이죠.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당시 초대교회에는 그런 이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위로도 권면도 알아듣기 어려운 방언으로 해 주었던 것 같아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요.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단순한 기도였을까 하는 점입니다. 어쩌면 기독교 신앙이 처음인 사람들에게, 아직 교리나 변변한 지침서조차 없는 이들에게 어려운 학문과 알 수 없는 신비하고 애매한 이야기로 현혹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방언은 더 넓은 차원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간혹 영어를 사용하며 대화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면 자신이 좀 나은 사람처럼 보여서일까요? 그런데 상대방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뭐 굳이 묻기도 뭐하죠. 그렇게 서로의 이해는 멀어지는 경우가 있죠. 그게 무슨 좋은 대화가 되겠습니까? 이는 저의 경우에도 해당되죠. 나 자신도 모르게 쓸데없는 외국어를 난발하는 경우들을 보죠. 분명 충분히 이해 가능한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도 말이죠. 이는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습관만을 우선시하는 태도죠. 어디 외국어뿐이겠습니까? 거두절미하고 나만이 아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허다하죠. 충분한 설명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마는 경우들입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말, 남과 다른 세계관의 말,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말을 강요하고자 하는 대화, 이 모든 것이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라면 어떨까요? 그것이 혹여 교회에서나 쓰는 말이라면, 기독교인만이 알아듣고 통용되는 말이라면 어떨까요?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즐거워하면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친절한 말을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끝까지 듣고, 끝까지 경청하는 태도, 그리고 눈높이에 맞춰서 이해와 공감의 말을 나누길 바라는지도 모르죠.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처지, 어떤 감정, 어떤 상황인지 모릅니다. 그런 이들과의 대화는 깊은 이해가 필요하죠. 그래서 먼저 듣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거예요. 그것이 친절이에요.

 

조금만 친절합시다. 내 생각만 하지 말고 조금만 남도 생각해 줍시다. 기독교인들만 중요하다 하지 말고,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 조금만 친절합시다. 조금만 더 들으면, 조금만 더 생각하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됩니다. 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됩니다. 그곳에 사랑이 있고, 그곳에 만남이 있고, 그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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