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11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어떤 날이 될까? 기대와 희망으로 이 아침을 열었으면 합니다. 귀하고 복된 날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이제 그 귀함과 복됨을 발견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가끔 길을 걷다 보면 그런 날이 있죠? 매번 걷던 그 길에서 낯선 가게들을 발견하죠. 신기하게도 새로 생긴 가게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었던 가게를 이제 발견하게 되는 그런 때 말이죠. 이미 우리 주위에 있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이 있죠. 오늘, 우리에게 이미 주신 은혜, 마치 보물 상자를 발견하듯 우리 곁에 있는 귀하고 복된 은혜를 새로이 발견하는 날이 되시길 빕니다.
바울은 은사의 완성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부분적인 것이라고 말하죠. 그리고 연이어 사랑 없는 은사를 미성숙한 어린아이에 빗대어 강조합니다.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에서 어린아이 같다고 말이죠. 다시 말해 사랑이 없는 말, 생각, 깨달음은 완성품이 아니라는 뜻이죠.
굳이 바울은 어린아이들을 폄훼할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가 '어릴 때'라고 말하는 때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 그러니까 나이가 작다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을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화두는 사랑이었죠. 그를 영접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 사랑이 들어온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어른이 된 것이라고 표현하죠.
이쯤에서 궁금합니다. 바울은 그 사랑을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였을까요?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참 대답하기가 곤란합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다양해서죠. 어떤 의미로 보면 사랑을 자기만의 해석으로 표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때론 그런 사랑이 사랑이 맞나 싶을 만큼 자기를 위한 사랑이 넘쳐나죠. 그래서 사랑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정의 내리는지가 무척 궁금해요.
아시다시피 바울은 그리스도와 대척점에 있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표현된 그 만남은 아주 단순합니다. 바울의 귀에 음성이 들렸고, 그 음성은 스스로를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하죠. 그리고 그에게 아나니아를 소개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동기로 작용하죠. 과연 그분의 음성이 그 동기의 전부였을까요? 때론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죠. 바울도 그랬을까요? 그 마음을 헤집어 보기 전에는 알 도리가 없지만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부분을 바라봅니다. 재미있게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 눈이 멉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 거죠. 이게 의미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이에요. 바로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기회를 주신 거라고 말이죠. 아마도 그는 생각했을 거예요. 그 생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아마도 이것 아니었을까요?
'왜 날까?'
가장 극심한 반대자이고, 대척점에 선 나를, 가장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은 나를, 하필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나를, 왜 나일까? 싶은 생각에 빠지지 않았을까요? 저라면 분명 그랬을 것 같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서 내려진 결론이 있어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 중에는 내 편이 있고, 네 편이 있죠. 가까운 사람이 있고 먼 사람도 있습니다. 일생을 통해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죠. 그래서일까요? 사람들은 나와 맞는 사람, 나에게 이롭고 유용한 사람들을 만나길 원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그것을 잘못된 만남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바울이 느낀 사랑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에게 '사람'은 동역자였어요. 그 어떤 사람이든, 그 누구든, 현재 나와 대척점에 있든, 관심이 없는 사람이든, 그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는 그가 만든 동역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바울은 자신에게서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이죠.
사랑이 그런 거예요. 뭘 특별한 것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나의 동역자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요. 멀고 가깝고, 좋고 나쁘고, 맞고 안 맞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든, 그 누구든, 모든 생명은 바로 나의 동역자로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라고요. 모든 사람들은 나를 위해 만들어진 돕는 자들이라고요. 우리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면 어떨까요?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를 분별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은 서로의 동역자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이죠.
좋은 사람은 없어요. 내가 좋게 보는 사람만이 좋은 사람입니다. 나쁜 사람도 없죠. 내가 나쁘게 보면 그 어떤 사람도 나쁜 사람이니까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의 생각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남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책임 있게 결정하는 것이죠. 오늘도 우리는 어른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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