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압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계속됩니다. 본문의 분량이 길지만 내용은 간단합니다. 그들이 심판에 이르게 된 이유는, 교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만이라는 말을 모르는 분들이 계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이라고 되어 있네요. 그런데 오늘날 같은 때에는 이 교만의 범위가 아슬아슬합니다. 잘난 것을 잘났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자신의 실력을 오히려 드러내고 사용하고 평가받는 것이 더 자연스럽죠. 이런 모습을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겸손이라는 단어 또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죠. 자신의 진가,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감추는 것이 겸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력은 실력대로, 잘남은 잘남대로 드러나고 사용되고 쓰임 받지만, 그러나 그것을 나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이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다림교육에 많은 고등학생들이 교육봉사를 신청하는데요. 그들이 그래도 공부 쫌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 신청을 할 수 있는 거죠. 혹시나 혼자 ‘내가 1등도 하지 못하는데 누구를 가르치냐?’고 생각한다면 그게 겸손일까요? 교육봉사가 공부 잘한다는 잘남을 드러내는 뽐냄일까요? 아마도 그렇다면 다림에 오는 자원봉사자들은 모두 다 교만하고, 겸손하지 않은 이들일 것입니다.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교만은 그 실력을 나를 위해 사용할 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 관점에서 모압의 교만에 대한 메시지를 우리는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압의 교만을 오늘 본문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남을 조롱한다는 것이죠. 모압의 교만을 27절에는 남을 조롱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29절에는 우쭐대고 뻐긴다고 되어 있어요. 우쭐댄다는 의미를 조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를 개역개정성경에서는 ‘자고’라고 번역해 놓았는데요 스스로 높아진다는 뜻이죠. 이는 남과의 비교가 필수적입니다. 그러니까 남보다 자신이 낫다고 하는 셈이죠. ‘우쭐’은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시 말해 남을 무시하는 것, 남을 비판하는 것이 담겨 있는 거죠. 그것이 조롱입니다.
우리는 남에 대한 흉을 잘 봅니다. 그 흉에는 자신이 그보다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 담겨 있죠. 그 교만은 허풍과 거짓말을 필수적으로 동반합니다. 자신이 그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허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오십 보 백 보니까요. 내가 비판하는 그나, 나나 별반 다르지 않은 연약하고 부끄러운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비판한다면 자신을 극대화해야 하기 때문에 거짓말과 허풍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26절입니다.
26 "모압이 나 주를 거슬러 자만하였으니, 모압에게 취하도록 술을 먹여, 마침내 그가 토하고 그 토한 것 위에 뒹굴어, 스스로 조롱거리가 되게 하여라."
이 말씀을 쉽게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모압이 남을 조롱하고 비판하였으니, 그 또한 스스로 조롱받고 비판받게 하라”
예수께서 산 위에서 설교하실 때 끝자락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마 7:1~5,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말하기를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 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교만한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누군가를 조롱한 대로 그도 똑같은 이유로 조롱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군가를 비판한 대로 그도 똑같은 이유로 비판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신기하게도 목회 경험상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남을 교회 안 나온다고 비판하던 사람이 교회에 안 나오는 경우가 훨씬 많고, 남이 일 안 한다고 투정 부리는 사람일수록, 결국 일을 안 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 비판이 자신의 가슴에 꽂혀 헤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불만과 불평, 잘못되고 안 좋은 부분이 늘 있는 사람은 결국 그것으로 실족해서 자신도 영성을 잃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군가를 권면하고 바로 세우는 일은 비판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비판은 오히려 나를 향한 칼이 됩니다. 불만이 있을수록 더 헌신해야 하고, 눈에 걸리는 부분이 있을수록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만이 나를 삼키고, 내 눈에 걸렸던 부분에 나 또한 걸려 넘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남을 조롱하고 비판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교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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