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있죠. 이런 경우를 적반하장이라고 하죠. 오늘 본문이 딱 그런 꼴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집트 문화에 익숙해지자 우상 숭배가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상에 절하고 재물을 바치는 일이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자연스러워진 것이죠. 그런데 그들이 지금 예레미야에게 항의를 합니다. 하나님 섬길 때보다 우상을 섬길 때가 더 좋다는 것이 항의의 요지입니다. 참 기막힌 일이죠. 죄짓는 자가 막는 사람에게 오히려 저주를 하는 꼴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제 충격적이지도 않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그들의 곁을 지키는 예레미야가 대단해 보입니다. 또한 부럽기도 합니다. 어떤 감정이나 상황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더 중요히 지키는 모습이 미련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어요.
오늘 본문에서는 죄에 익숙해져 가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중심 주제이지만 오늘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더 많이 묵상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 같아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마도 요하난 일행은 이집트가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도 자신들은 잘살 수 있으리라 믿었을 테죠. 그들의 예상대로 이집트에서 그들은 자리를 잡았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바빌로니아의 공포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공포 앞에 사로잡힙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나를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 같은 것입니다. 바로 ‘익숙함’이죠. 그들은 이집트의 문화에 익숙해지고 동화되어 갑니다. 자연스레 그들에게는 이전의 것보다 현실의 것이 더 가까워졌겠죠. 그렇게 알게 모르게 우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함의 공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공포를 느끼지 못하죠. 그래서 더 치명적입니다. ‘이쯤은 괜찮을 거야’ ‘남들도 다 하는데 뭐’ ‘이게 현실이야!’ 익숙함의 공포가 속삭이는 메시지들은 대충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그리고 과거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무장해제를 시키죠. ‘기도한다고 달라지냐?’ ‘다 좋으라고 하는 것인데..’ ‘불편한 것보다 편안한 것이 최고야’ 그들의 속삭임은 어느덧 어렵게 쌓아놓은 신앙의 근간을 손쉽게 무너뜨립니다.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라고 하죠. 이것이 익숙함의 공포입니다.
교회를 한두 번 빠지면 어떤 일이 생기는 줄 아십니까? ‘뭐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하면 좋겠으니 익숙함의 공포는 교회를 빠지고 공동체에 소홀하면 외부의 어떤 반응보다 먼저 내면의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괜히 다시 나가는 것이 쑥스럽고, 다른 사람 눈초리가 이상한 것 같고, 자신만 소외된 것 같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는 것 같아 보이죠. 참 재미있는 사실은 소외감을 말하는 이들의 특징은 먼저 자신이 다른 이들을 소외시킨다는 것입니다. 잘 나오지도 않고, 함께 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소외되었다고 말하죠. 적반하장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익숙함의 공포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죄도 익숙해지면 평범해집니다. 아무리 잘못된 길임을 알아도 자주 하면 잘못이 잘못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때에는 참된 것이 오히려 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죄에 익숙해지고, 잘못된 것의 동반자가 되어 버리죠.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익숙함은 나를 그렇게 인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에 익숙해지지 마세요. 그러기 위해서 늘 밝은데 서 계세요. 늘 공동체에 함께 하시고, 늘 기도하는 자리에, 늘 예배하는 자리에, 늘 웃는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익숙함의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의지를 동원해 늘 주님의 자리를 지키는 것뿐입니다. 오늘도 익숙함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끌려다니지 마시고, 늘 그리스도인의 자긍심으로 사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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