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요하난 일행은 이집트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납니다. 요하난이 그달리야를 따르던 백성들은 물론 예레미야까지 이집트 땅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끌고 간 것인지, 아니면 예레미야 스스로 따라간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정황상 끌려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지만 그래도 예레미야가 이집트로 간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집트행을 반대하셨기 때문이고, 그 메시지를 예레미야가 전달했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요하난 일행이 예레미야를 굳이 끌고 갈 이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죠. 자신들에게 쓴소리하는 이를 데려가고 싶었겠습니까? 만약 끌고 가야 할 이유가 굳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그에게 들을 말이 남아서였을 텐데요. 그러기에는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눈엣가시였을 테죠. 예레미야가 사생결단하고 이집트로 가는 것을 막지 않은 것도 의문입니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연약함과 함께 또 다른 메시지를 보게 되는데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선지자의 고독함입니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집트에 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알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곳에서의 삶이 요하난 일행이 꿈꾸는 것과 다를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따라 그곳에 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여전히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로 남기 위함은 아닐까요? 복음성가 가운데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라는 찬양이 있는데요. 후렴 가사가 이렇습니다.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어쩌면 원치 않는 길이지만, 어쩌면 가고 싶지 않은 길이지만, 그보다 그에게 맡겨진 사명, 즉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가 되기 위해 내 생각, 내 뜻을 접는 선지자의 고독함이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죠? 왜냐하면 자식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며 도와야 하기 때문이죠. 비슷함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것 같아요. 우리의 사명은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보다 우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길을 가고, 다른 마음을 품어도 이웃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사명을 버리는 일이고, 나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을 버리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늘 져줍니다. 사랑은 늘 져주는 일이죠.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나의 감정이나 이념도,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보다 우선할 수 없어요. 그래서 또 용서하고 져줍니다. 선지자의 고독함, 그 모습이 애잔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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