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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묵상14- 우리가 받을 복보다 그분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가 먼저입니다. 예레미야 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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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아직 어린 자녀들은 실감을 못 하는 듯 보였고,
홀로 남겨진 아내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
보기에도 안쓰러운 그런 장례였습니다.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지만 안면이 있었던 터라
찾았던 조문길에는 생각보다 훨씬 큰 무게감 때문에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
이런 슬픔의 현장에서 곧잘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위로를 전해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지나간 과거는 묻고, 이제 새롭게 시작하지…’
우리가 자주 듣고 하는 말이죠.
슬픔에 머물지 말고 이제 다시 일어나자는 말이겠죠.
우리가 고작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일지도 모르죠.
제 입에도 자주 올렸던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느끼고 알고 생각해도,
이 아이들이 가질 허망함, 상처, 슬픔과는
같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죠.
저는 어릴 적, 부모를 잃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제가 같은 경험을 했다손 치더라도
결코 같은 마음, 같은 무게의 감정일 수는 없겠죠.

‘섣부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아직 익지 않았다는 의미의 말이죠.
저는 그 장례 자리에서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런 것이었는데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섣부른 위로를 남발했을까?”
“목회자라고 누군가를 위로한답시고 한 섣부른 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혹시 그들의 마음에 공감하지도 못하면서 위로를 건넨 적이 얼마나 많을까?”

목회자의 직업병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야 하고,
누군가에게 사랑과 은혜가 되어야 하죠.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직업처럼 위로를 전하고,
직업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하죠.
직업처럼이란, 무의식적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슬픔에 공감하기도 전에 위로를 하고요.
마치 이해하기도 전에 사랑을 이야기하죠.

섣부른 위로보다 공감이 먼저입니다.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보다 더 먼저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고요.
결론을 내려주기보다 더 먼저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에게, 아니 저에게는 그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또 한 번 떠올랐어요.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읽기도 전에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생각을 알려고 하기 전에 주님께 기도하죠.
그분을 이해하기보다 나에 대한 이해를 먼저 구하고요.
그분의 말씀을 듣기보다 내 말을 먼저 합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결정하기도 전에,
그분은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규정하죠.
그분이 나에게는 어떤 분인지를 알기도 전에 말이죠.

주님의 사랑을 말하기 전에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인정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공공장소에서 활개 치는 아이들을 제지하기 힘듭니다.
내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죠.
내가 소리치고, 가르치고, 또 훈계할 수 있는 이유도
내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남자에게나 내가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남편이니까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이고요.
아무 여자에게나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아내이니까 함부로 대하죠.
오해하지 마세요.
남편이나 아내에게는 큰소리치는 것이 당연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큰소리치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조차
그 이전에 조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아내라는 조건 말입니다.
그 조건은,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고,
가장 소중한 존재이며, 가장 큰 존재임을 전제하는 것이죠.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소리치고, 무시하는 권리(?)조차 없는 것입니다.
큰소리쳐서 갈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함부로 대해서 관계가 깨지는 것이 아니고요.
바로 그 전제가 사라졌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모든 것을 받아주실 줄 알죠.
하나님은 너그러우셔서 모든 것을 이해해 주실 줄 알고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얕잡아 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고 떠드는 말이 나옵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재앙도 우리를 덮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란이나 기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은 늘 참으셨으니까요.
하나님은 늘 용서하셨고, 늘 이해해 주셨으니까요.
그러나 이 말이 진정한 위로가 되려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아셔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시고, 우리를 다 아시며,
지금도 우리의 죄 앞에서 십자가의 고통 같은 아픔을 겪으시고
참으시며 인내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죄를 아시고,
결코 속지 않으시고, 결코 모르시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분은 빈 마음의 제사도 아십니다.
그분은 이기적인 나의 신앙도 아시죠.
그럼에도 우리를 기대하시며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결코 몰라서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결코 몰라서 아무 조치도 안 하고 계신 분이 아니라는 말이죠.
오히려 우리의 완악함에 여전히 십자가의 고통을 겪고 계시는 분이라고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어떤 모습일지라도 사랑하시죠.
그렇다고 우리의 모습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지금 모습이 괜찮아서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의 죄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듯이,
변화 없고, 거칠고, 이기적인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그 죄를 지금 짊어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연상해 보세요.
두 사람이 청소해야 하는데요.
한 사람은 놉니다.
그러면 나머지 한 사람이 모든 청소를 도맡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빈둥거리며 노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사랑하죠.
사랑하니까 자신이 다 청소를 하는 거겠죠.
그렇다고 노는 그 사람의 행실이 선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가져야 할 성품도 아니죠.

오늘도 제게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귀한 여러분,
사랑을 구하기 전에, 그분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은혜와 복을 구하기 전에, 그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꿈꾸시는지, 그분이 바라보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먼저 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스스로에게 섣부른 위로를 전하지 마세요.
위로보다 공감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받을 복보다 그분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가 먼저예요.
내가 남편으로, 아내로 누릴 권리보다,
나에게 상대방이 어떤 존재인지가 더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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