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예인들의 학창시절 학교폭력 문제가 시끄럽습니다.
최근 잘 나가는 유명 밴드의 멤버가
고등학생시절, 같은 반 친구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사실이
폭로되어서 연예계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있었죠.
또, 유명 여자 가수도 같은 폭로를 당해 진실 공방 중입니다.
소위 일진, 그러니까 학생들 사이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집단을 그렇게 부르죠.
보통 사소한 일로 시비를 걸어 때리는 것은 기본이고,
돈을 갈취하거나 옷과 신발 등을 빼앗거나,
무엇을 사 오라는 등의 요구를 하거나,
더 나아가 집단의 폭행을 가하기도 하는 등의 문제들이
사회문제로 자리 잡은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작년 말, 인천에서는 한 중학생이 아파트에서 투신한 사건이 일어났는데요.
알고 보니 중학생들 4명에게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가
필사의 탈출을 하다 추락한 사건이었습니다.
폭력에 시달리고, 온갖 셔틀을 당하는 등 모진 폭력에 시달렸다죠.
더 경악했던 것은,
붙잡힌 일진 중학생 4명 중 한 명이
경찰에 붙잡혀 포토라인에 설 당시 입었던 옷이
피해자에게서 빼앗은 옷이었다는 것이죠.
피해자의 부모가 그 장면을 보고 기절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4명 중 서열 1위의 친구가
가장 서열이 낮은 친구에게 그 옷을 입혔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모든 비난을 그 친구에게 돌리려는 시도라는 둥,
혹은 그 옷을 당당하게 입고 모두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려 했다는 둥의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어떤 의도였든 모두가 끔찍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건에서 제가 충격을 받은 장면이 있어요.
그것은 그 학생들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느냐는 질문에서 나옵니다.
그 피의자 학생들의 대답이 이런 거예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그런 심리가 있습니다.
엄마에게는 신경질 내도 되는 줄 알죠.
아침에 당연히 밥 지어내라고 소리 질러도 되는 줄 압니다.
왜 안 깨웠냐고, 왜 챙겨주지 않았냐고,
지가 할 일을 엄마에게 핑계 되면서도,
그래도 되는 줄 알죠.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라는 노래가 있더군요.
그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남들은 다 가진 것들 왜 나는 없냐며 울음으로 화를 냈었던 철없던 그때
내가 원하고 바란 것들 것 다 들어줘야 되는 게 당신의 의무인 줄 알았던 듯 해
하루에 열 네 시간 식당일 마치고서 온 당신의 부르튼 손은 원래부터 그런 줄 알았어
내 행복과 맞바꾼 흉터란걸 나를 낳았을 때에 당신의 나이가 돼서야 알았어
늘 아버지와 나보다 먼저 눈을 떠 힘겨운 몸을 일으켜
아침상을 차린 후부터 당신의 고된 하루 일과에 또 불을 켜
그 시린 무릎도 화장 위로 패인 주름도 전부 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지
엄마니까 그 두 글자에 담긴 책임감, 보낸 시간, 그 둘을 몰랐어
나에겐 엄마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던 내 부끄러운 시간
늘 받기만 하니 난 고마운 것을 몰랐지
늘 주기만 하는데도 미안해하는 당신 어머닌 그래도 되는 줄 알았지’
모든 행동의 출발에 이 심리가 있습니다.
화를 내도 되는 줄 알았고,
막말을 해도 되는 줄 알았고,
함부로 때려도, 함부로 만져도, 함부로 희롱해도 되는 줄 알았죠.
그래서 그런 행동이 나오는 것이죠.
가까울수록, 잘해줄수록 이 심리가 작용합니다.
가만히 있을수록, 받아줄수록 그래도 되는 줄 알죠.
그래서 당연한 것이 됩니다.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우리교회 출신으로 한 청년이 목사가 되어서 교회를 개척할 당시,
개척예배에 축사를 부탁받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새로이 목회를 시작하는 그에게 당부의 말을 이렇게 한 적이 있어요.
세상의 삶은 당연하게 여기는 삶을 삽니다.
내가 노력했으니 당연히 결과가 있어야 하고,
내가 일했으니 당연히 보상이 있어야 하며,
내가 주었으니 당연히 받아야 하죠.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당연한 것이 없다고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도,
마치 육교 위에 앉아 구걸하는 거렁뱅이처럼
오직 지나가는 이들의 은혜로만 먹고 살 수 있다고 믿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요.
목회자가 당연함을 갖는 순간, 타락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만큼 성과를 냈으니 이 정도 보상받는 것이 당연하고,
이만큼 사역했으니 이 정도의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이 타락이라고요.
오직 내가 받고, 내가 누리고, 내가 갖는 것은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과 바꾼 사랑입니다.
쉬운 사랑이 아니에요.
거저 주는 사랑이지만 남아서 주시는 사랑도 아니고요.
값없이 주는 사랑이지만 값어치 없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받는 자녀이니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함부로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4~5절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지금 너는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오랜 친구'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끝없이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면서, 온갖 악행을 마음껏 저질렀다."
모든 악행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아버지니까 그래도 된다.’
‘오랜 친구니까 그래도 된다.’
‘참으시고 용서하시니까 그래도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우리 악행의 시작이죠.
자녀들에게 부모가 거짓말 잘하시죠?
약속하고 잘 안 지키죠?
설마 그것을 기억할까? 설마 그렇다고 나를 비난할까? 하시죠?
잘 모르는 어린아이에게는 그래도 되는 줄 아셨나요?
그런데 그 모습이 상처가 되어 아이의 심령에 새겨집니다.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막말해도 되는 줄 아셨나요?
반항하지 않으니까, 대꾸하지 않으니까 내 말이 통하는 줄 아시나요?
아내는 함부로 다뤄도, 남편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줄 아셨나요?
설마 결혼한 사인데? 내가 저 사람을 아는데?
아무 반응 없다고, 덮어주고 넘어갔다고, 그 상처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내가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나에게 사랑받고 존중받을 사람만 있습니다.
나에게 가깝다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나에게 존중받고 사랑받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도 그렇습니다.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심은, 내가 가까이 갈 수 있는 복을 받은 것이고요.
그분이 나의 아버지심은, 내가 사랑을 드릴 수 있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죠.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마세요.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나에게는 오직 은혜만 있고, 축복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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