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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야고보서묵상

하나님이 나의 길을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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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기다림2] 하나님이 나의 길을 인도하신다.

야고보서5:10~11,

10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11    보십시오. 참고 견딘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또 주님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여워하시는 마음이 넘치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크십니다.

 


1.

성경 상에 영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미스테리한 인물은 다윗이다.

다윗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온갖 범죄함으로 점철된 사람이다.

그는 다른 이의 아내를 가로챈 가정파괴범이었고, 

간접적이긴 하지만 살인교사를 한 죄악도 저질렀다.

그는 아버지로서도 결격사유가 있다.

바로 편애의 대표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해 그 가족 주변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2.

그런데도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묘사한다.

물론 그의 간절한 회개와 돌아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그 죄를 덮고 더 나아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칭함 받기에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우리도 갖은 죄의 문제에 빠졌다가 회개하기를 밥 먹듯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분명 다윗은 우리와는 다른 어떤 삶이 그에게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와 다른 어떤 면이 다윗에게 있었을까?

3. 

그 중에 하나의 단초를 꼽자면 나는, 그가 지은 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로 일컬어지는 시편 23편이 아닐까 한다.

시편23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4.

시23: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다윗은 주님이 나의 목자이심이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는 다른 성공이나 방향을 거들떠보지 않아도, 오직 주님만 있다면 부족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주님 이외에 다른 것이 없으면 부족함을 느끼는 우리와는 다른 고백이다.


5.

시23: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다윗은 주님이 자신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시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 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부분은 다 이 부분을 논증하기 위한 고백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성공이나 부가 자신의 인생을 인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나 백그라운드가 자신을 성공의 길로 인도한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오직 주님이 나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6.

이 구절을 더욱 명확히 하는 구절은 바로 3절이다.

시23: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인도하시는데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원칙이 있은데 그것은 바로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원칙이다.

나를 위해서도 아니요, 내가 원하는 것으로 인도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당신을 위해서,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나를 위해 새 힘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가기 위해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신다.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옛 것은 버리도록 새 힘을 주신다.


7.

그 때문에 우리는 때로 죽을 것 같은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시23: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그 때문에 우리는 때로 원수 앞에 놓여 풍전등화와 같은 고비도 겪는다.

시23: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인도하신다고 고백한다.

끝내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확신한다.

 

8.

당신은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는가?

당신은 성공과 예수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겠는가?

다윗과 우리가 다른 이유다.


9.

내가 선교사 활동을 할 때 함께 선교훈련을 받았던 분이 계시다.

그분은 미국의 인디언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미국인도 아닌 한국인이 인디언 선교사로 파송된다는 것이 좀 의아했다.

인디언은 미국 땅이고, 미국 교회들이 담당해야 하지 않을까?

몇 년이 지나 그분을 만나 인디언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해를 했다.


10.

본래 미국 땅이라는 것은 인디언의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데 유럽에서 신대륙을 발견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영국과 프랑스는 대륙의 기득권을 놓고 전쟁을 시작했다.

그 전쟁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이 때 인디언은 프랑스 편을 들어 참여했지만 결과는 영국의 대승이었다.

어떻게 되었겠는가?

영국에 의해 인디언들은 보복을 당하면서 쫓겨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미국의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의 편을 들지 못해 천추의 한으로 남은 인디언은 이번에 영국쪽에 섰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번에는 미국이 이겼다.

또다시 인디언은 미국의 보복을 당해야 했다.

심지어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은 “인디언제거법”까지 만들어 그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11.

인디언선교에 대한 생각을 인디언과 미국의 악연을 듣고 이해했다.

그런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했다.

여러 민족적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인디언이 패망의 길을 간 이유 말이다.

그것은 자신의 길을 힘과 권력에 맡겼다는 것이다.

프랑스가 영국보다 권력이 셀 것이라 믿은 것이라든지,

영국이 미국보다 힘이 셀 것이라 생각한 것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맡겼다.

그것이 패망의 지름길이었다는 것이다.


12.

사실 어려운 문제가 닥치고, 유혹이 몰려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가야할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내가 가야할 길을 안다면 문제와 유혹은 싸울 대상이 된다.

그러나 내가 가야할 길을 모르기에 문제와 유혹이 커 보이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이자 성공회사제였던 찰스 킹슬리는 이렇게 말했다.

“제 갈 길을 아는 사람에게 세상은 길을 비켜준다.”고...


13.

알고 보면 다윗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는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본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에 쫓겨 광야와 동굴로 숨어 다녔다.

점점 포위망은 좁혀오고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암담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무방비 상태로 잠든 사울과 맞닥뜨렸다.

주위에서는 이번이 사울을 죽일 기회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창이나 칼에 인생을 맡기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겼다.

그것은 나중에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르는 후회를 낳을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권세로 자신의 길을 만들지 않았다.


14.

그 뿐이 아니다.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간접살인을 한 것이 드러날 위기다.

나단선지자는 다윗에게 와서 호통을 쳤기 때문이다.

그때, 다윗은 이 사실을 숨길 것인가? 엎드려 회개할 것인가? 기로에 섰다.

사실로 드러나면 온갖 창피와 어떤 문제가 닥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나단선지자 한 사람 입을 막으면 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알지 못하지만 회개를 선택했다.

자신의 길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15.

요즘 나라가 어수선하다.

어떤 기업인 한 분이 억울함에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자신의 돈을 부정한 방법으로 받은 이들의 리스트를 작성했다.

그 일로 일대 정치권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액수를 받아먹었는지 관심 없다.

내가 가슴 아프고 쓰린 것은 그들의 반응이다.

하나같이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리고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하루에도 수도 없이 한다.

왜 그러는 것일까?

‘여론과 평판’에 자신의 길을 묻기 때문이다.

힘과 권력에 자신의 길을 묻기 때문이다.

속임수와 이미지에 자신의 길을 묻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사람은 현실에서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조만간 드러난다.

권불십년이다.


16.

최근에는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한 교회가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 교회 목회자는 회계부정과 박사학위 논문표절이 드러났다.

그 교회 담임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박사논문은 아무나 쓰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결코 그의 능력이나 실력이 형편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 같으면 하지도 쓰지도 못할 일이다.

문제는 실수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사논문을 표절했다는 것을 문제 삼지만 나는 그것은 회개하면 용서받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라 말할지라도, 회개해서 용서받지 못한 죄는 없다.

문제는 박사논문 표절이 아니다.

다윗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가 박사라는 타이틀, 명예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무너지면 자신의 길이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7.

믿음은 하나님께 두 팔을 벌려 들고 항복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항복이다.

내가 항복하면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의 삶이다.

내가 지키려하면 하나님이 채우실 방법이 없다.

내가 지키려하면 하나님은 떠나신다.


18.

딱 30년 전인 1985년 이 맘 때, 나는 홍콩의 어떤 산을 오르고 있었다.

개방이 되기 전인 중국을 방송으로 선교하는 루터란아워 관계자들에 이끌려서 어딘지도 모르고 올라갔었다.

산 정상에 올라가서야 나는 이곳으로 인도한 이유를 알았다.

아래로 중국 마을이 끝도 없이 펼쳐져 보였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중국 땅을 보았다.

그 당시 중국은 죽의 장막이라는 별칭을 가질 정도로 베일에 가려 있었다.

멀리 다닥다닥 붙은 초가집(?)바다 한 가운데 커다란 대형 입간판이 보였다.

코카콜라 선전 간판이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중국 땅에 복음보다 코카콜라가 먼저 들어갔구나... ”

그리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기도했다.

“주님, 중국 땅에 나를 보내 주세요. 저 곳에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19.

그 후로 10년이 지나서여 나는 선교사로 헌신했다.

곧 선교사로 파송될 내게, 아내는 졸업도 미루고 서둘러 결혼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터키선교를 꿈꾸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떠나기 직전, 감리교본부에서 도움 요청이 있었다.

잠깐 중국에서 신학교 설립에 관한 프로젝트를 타진하고 오라는 것이다.

나는 감리교본부에서 내게 선교사훈련을 하는 줄 알았다.

그곳이 바로 하얼빈이다.

그곳을 다녀오자 감리교본부는 나에게 중국선교를 제안했다.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나의 계획이 차질을 빗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중국은 공산국가로 무서웠다.

그래도 제안을 받았으니 건성이라도 기도해야겠기에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기도하고 거절하면 그래도 좀 폼나잖아~^^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대한 기도를 설렁설렁하고 있는데 거의 마지막날 쯤 되어 갑자가 10년 전 홍콩의 어느 산에서 기도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10년 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기도가 하필 그 시간에 기억났다.

당신이 한 기도를 다 기억하는가?

그런 지나가는 기도는 잊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 기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순종하기로 했다.

중국에서 어려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행복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의 민낯을 다 보았고, 알량한 신앙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았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고,

그런 죄인인 나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리고 나의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셔야 온전히 간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20.

물론 이와 전혀 반대되는 상황도 나에게 있었다.

이제는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우리교회는 처음부터 공동목회를 했다.

나이나 직급과는 상관없이 공동목회자의 월급은 늘 같았다.

우리 집은 알아서 해결했어도 공동목회자의 집은 늘 마련해줘야 했다.

그 어려움은 2008년에 들어서 극심해졌다.

목회자 둘 중의 하나는 나가야 해결될 것 같았다.

아이들도 크고, 해결할 일들도 많아졌다.

강목사가 여러 곳을 알아보았으나 모두 다 거절당했다.

그 때, 나에게 다른 교회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몇 차례를 거절했으나 선배목사님의 요청은 간절했다.

차라리 내가 나가야 이 교회와 공동목회하는 분을 위할 줄 알았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인도가 아닌 나의 길을 갔다.

순전히 나를 위하고, 동료를 위한다는 인간적인 마음으로 정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오래가지 못했다.

반년도 채 가지 못해 하나님은 처음 내가 삶의 방향을 고백했던 그 자리로 나를 되돌려 놓으셨다. 


21.

나는 그 하나의 결정으로 수많은 오해와 비난을 지금도 받고 있다.

대부분 터무니없고, 거짓이지만 나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닌 나의 길을 간 대가였기 때문이다.

마치 다윗이 자신의 길을 갔다가 그 결과로 아들에게 쫓기고, 모욕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닌 자신의 길을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아 묵묵히 걷듯이 나 또한 그렇다.

아마도 이 모욕과 비난은 죽을 때까지 지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


22.

두 팔을 들고 하나님에 의지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나는 구체적인 미래의 계획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지만 내 대답은 ‘모른다.’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나는 끌려 갈뿐이다. 

그렇게 끌려 갈 때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23.

야고보는 욥의 인내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야고보는 욥에 대해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욥이 어떤 사람인가?

갖은 고난에도 참고 견딘 인내의 사람으로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욥은 초기엔 그랬는지 몰라도 극심한 고난 앞에 그의 불평은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만큼 어렵고 괴로웠기 때문이다.

24.

인내의 사람이라 여겨진 욥이 이와같을진데 하물며 우리는 어떠랴?

그런데 낙심할 필요가 없다.

야고보가 지금 우리에게 소개하는 이는 욥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욥이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욥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향한 긍휼과 자비가 넘치신다.

그러니 끝까지 기다리라.


25.

욥의 장점은 잘 견디는 것이 아니다.

욥의 장점은 아픔을 잘 참는 것도 아니다.

그의 장점은 아프고 괴로워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해도 주님께 했다는 것이다.

자포자기하거나 낙담하여 떠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체념하지도 않았다.

비록 불평과 원망이지만 끝까지 주님을 붙들고 울었다.

그래도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그분 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26.

인내는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인내는 슬픈데 웃는 것도 아니다.

인내는 아픔도, 슬픔도, 괴로움도, 답답함도 주님 앞에서 토로하는 것이 인내다.

황홀한 기다림 속에 주님은 당신의 길을 예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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