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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여호수아서묵상

여호수아서묵상일기 33 - 믿음은 나를 버리는 용기와 그분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종과 때를 기다리는 인내를 포함하는 종합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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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 5:4~8   여호수아가 할례를 베푼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백성 가운데서 남자 곧 전투할 수 있는 모든 군인은, 이집트를 떠난 다음에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다 죽었다. 그때에 나온 백성은 모두 할례를 받았으나, 이집트에서 나온 다음에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이집트를 떠날 때에 징집 연령에 해당하던 남자들은, 사십 년을 광야에서 헤매는 동안에 그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우리의 조상에게 맹세하셨지만, 이집트를 떠난 조상이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볼 수 없게 하겠다고 맹세하셨다. 그들을 대신하여 자손을 일으켜 주셔서,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는데, 그것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아서, 그들이 무할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백성이 모두 할례를 받고 나서 다 낫기까지 진 안에 머물러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외치며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오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하루가 될 거야!' '오늘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일들이 벌어질 거야!' 이 아침에 오늘 어떤 기대를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기대를 하든 그 기대보다 훨씬 좋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일은 기대하는 이들에게만 벌어집니다. 구하고 찾는 이들에게만 보이죠. 그래서 이 아침에 우리가 오늘을 좋은 기대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넌 후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이후 하나님과의 약속을 의미하죠. 그래서 유대 민족들은 태어난 후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지나면서 유대민족들은 할례를 행하지 못했죠. 오늘 본문은 지금 할례를 행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명분이야 분명하지만 그 할례의 때가 적절한가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작금의 상황은 여리고로 진격하는 전쟁의 상황입니다. 아직 여리고 전투는 벌어지지도 않았죠. 그러니까 지금은 전시 상황이고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전야와 같은 상황이라는 거죠. 그런데 하필 이때 할례를 행한답니다.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옛날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으로부터 더럽힘을 당했습니다. 이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은 복수를 다짐하죠. 교묘한 속임수로 이들을 진멸한 계획을 짭니다. 그 계획이 바로 세겜으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이었죠. 세겜의 아들들이 할례를 받으면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디나를 얻고 싶었던 세겜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죠. 그리고 할례를 받고는 꼼짝없이 며칠을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때,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을 쳐들어가 그들을 몰살시켰죠.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유대 민족의 약속의 증표였고, 또한 민족적인 전통이었기 때문에 그 명령에는 잘못이 없어요. 그러나 그것이 전쟁중일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것은 그냥 앉아서 죽으라는 이야기와 같기 때문이죠. 그것을 몰랐을 리 없는 여호수아가 어찌 이런 순종을 할 수 있었을까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랬을까요? 물론 순종의 대가인 여호수아이니만큼 그 가능성도 있지만 여호수아의 개인적 성향을 보면 또 그럴 사람이 못되기도 하죠. 그는 꽤나 신중한 사람이고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생각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런 일을 행했다면 그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죠. 어차피 우리가 나서는 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뿐이죠.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도 그들이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도우심이었죠. 홍해도 그들이 건넌 것이 아니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광야도 요단강도 이스라엘 힘으로 지나온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전쟁의 결과는, 해봐야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이미 드러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죠. 아무 생각 없이 갔더니 은혜가 되더라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이미 갈급한 심령으로 참여하고, 기대와 준비된 영혼들이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죠. 그래서 은혜는 설교자나 준비한 예배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갈급한 개개인의 영혼의 문제에서 결정이 됩니다.

 

열왕기하에 보면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나병에 걸리자 엘리사를 찾아가게 되죠.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성경은 쉽게 설명해 줍니다. 나아만이 병을 위해 이스라엘에 간다고 통보하자 당시 이스라엘 왕이 옷을 찢으며 통곡했습니다. 나병에서 회복되지 않을 경우 당할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런 나아만을 엘리사는 무례하게 대합니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종을 보내 그를 맞이하죠. 게다가 개나 소나 목욕하는 요단강 강물에서 몸을 씻으라는 말만 하고는 사라집니다. 나아만이 기분이 나빴던 것은 당연하죠. 그러면서 노하며 돌아섭니다. 그때, 성경은 그의 분노의 말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죠.

 

왕하 5:11, "내 생각에는..."

 

자신의 생각에는 지금 엘리사가 무례하다는 이야기죠. 자신의 생각에는 지금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죠. 자신의 생각에는 지금 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 나의 생각을 앞세우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그저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각을 접어야 순종이 가능한 것이죠. 지금 할례가 줄 어려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버려야 할례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낫기까지 기다렸습니다. 믿음은 나의 생각을 버리는 용기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종과, 그리고, 기다리는 인내가 포함된 종합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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